|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2월 24일 일요일 오전 02시 34분 07초 제 목(Title): 길벗/김민웅 피리를 불고 춤을 추니 출처: 길벗교회 http://www.gillbott.org 피리를 불고 춤을 추니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까?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그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통하게 울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하는 것과 같다. (누가복음 7장 31절-32절) 자기 고향이 아닌 곳에서, 특히 이국 땅에서 "설"을 맞는 감회는 아무래도 새삼스럽기 마련입니다. 온통 다 이 설날을 함께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만 "우리끼리의 고유한 느낌"을 나누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안에 유독 우리만이 서로 알 수 있는 특별한 신호와 관습과 가락이 있는 까닭입니다. 새해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살다가, 다른 문화와 구별되는 우리 나름의 새로운 시간의 경계선이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닫고 무언가 다른 행동과 다른 어울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때가 되면 깊숙이 넣어두었던 한복을 꺼내 입고, 우리 고유의 놀이를 즐기고, 우리 음식을 먹는 것이 당연지사인 듯이 여겨집니다. 적어도 이 날 하루, 서구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잃어버렸던 우리를 그나마 이런 방식으로라도 되찾겠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때 "구정(舊正)"이라고 해서 신정(新正), 즉 서양달력 기준의 신년보다 낙후한 개념으로 취급했거나 또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웬 "민속의 날"이라고 해서 그 본질적 개념 자체가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설을 쇠면 이중과세(二重過歲)라고 해서 "아니 신정에도 놀더니 또 놀아?"라고 무슨 천덕구러기처럼 구박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설"이 자기의 본래 자리를 찾은 것은 최 근래의 일입니다. 주체성을 상실하면서 지내오던 한겨레의 문화적 자기 정체성에 대한, 뒤늦은 그러나 다행스러운 각성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설이 다만 시간의 새로운 시작으로 그치는 개념이 아니라, 그간 사느라고 바빠 소식을 자주 나누지 못했던 혈족, 친족, 벗들과의 만남과 그 기쁨을 함께 담고 있는 <공동체적 차원>이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설의 더 중요한 면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혼자서 외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을 격식 없이 나눌 수 있는 친근하고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줍니다. 그래서 서로간에 축복의 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좋은 음식을 차려 흥겨운 자리를 펼치려고 노력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날에는 혹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섭섭했거나 상처를 받았던지 아니면 편치 않았던 심사를 모두 털어 내고 분위기를 일신(一新)해서, 하나로 어울리는 명절의 유쾌함을 맛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날이 우리의 인생사와 문화 속에 있다는 것은 굳이 따로 무슨 명목을 잡지 않아도 인간사의 복잡한 갈등이나 긴장을 푸는 일에 도움이 될 터이라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이라는 말의 유래도 나이를 뜻하는 몇 살 몇 살 할 때의 "살"의 변형이라는 주장도 있고, "설익었다"는 말에서의 <설>, 그러니까 "아직 낡지 않았다, 또는 아직 새롭다, 아직 충분히 시간이 경과한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와 통한다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다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개의 생각을 하나로 묶어 <생명의 관점>에서 풀어보면, "새로운 생명으로 시작하는 날"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법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우선 나이를 뜻하는 "살"도 따지고 보면 "살다"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 살 더 먹었다", 라는 것은 생명의 나이테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으로 이 "살"은 본래 생명을 뜻합니다. 거기에 동사형 어미 "다"가 붙어 "살다" 즉, 생명 활동을 뜻하게 된 것이지요. 생명을 담고 있는 육신을 "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시들거나 병이 나면 무엇보다 우선 살 색깔부터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살을 잘 만져주고 그 살의 상태에 맞는 적절한 자극을 주는 일은 생명을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가령 아기의 몸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면 그 아기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나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라고 할 것입니다. 그 "살"에 "아직 새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설"이 중첩된다면 <새로운 생명>이 될 것이니 말입니다. 해서, "설날에 한 살을 더 먹으니" 다만 음력으로서의 새해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시작하는 시간>이라고 받아들여져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까 말했던 공동체적 차원을 결합시키면, 그 공동체 전체가 새로운 생명의 출발을 기쁨으로 나누는 날이라는 발전적 해석도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이 현실이 되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무엇보다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이 각성되고 체험되지 않는 새로움이란 단지 외형적 차원의 변화에 그칠 뿐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 사랑의 기운이 흐르고 그 기운으로 서로가 격려 받고 몸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루어 내야 할 정신적 아름다움입니다. 이 아름다움이 우리를 자라게 하고,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구원이란 다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자신의 존재가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의 본성으로 충만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명을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볼 것이며, 그 나라가 그의 것이 되는 법입니다. 설이 우리 고유의 전통을 회복하고 우리 고유의 관습을 절기의식처럼 지내는 것으로 머문다면, 우리는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이 날의 진정한 기쁨을 승화시켜낼 수 없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진실로 되찾아야 하는 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적 주체성을 넘는 영적 쇄신이자 생명의 활기를 솟구치게 할 사랑의 능력인가 합니다. 이 마음이 충만해질 때 그 어떤 잔치도 다 우리 모두에게 은총이 됩니다. 이것이 빠진 축제는 안식일 자체를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자의 규격화된 삶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정작 무엇을 잃어버리고 사는가, 그래서 무엇을 되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깨우침을 이루어내지 못하면 아무리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고들 외쳐도 그것이 나의 진정한 성숙이나 기쁨과는 상관이 없는 야단법석과 소란스러움으로 끝나고 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축제의 뒤끝은 허무와 고독이며, 피로함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정신적 부패와 생명의 기운이 쇠진해가고 있는 것을 절통해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정신혁명의 전야(前夜)>와 같은 시각에 등장한 인물이 다름 아닌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에게 영적 새로움의 불길이 뜨겁게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제발 마음을 고쳐먹고 하나님 나라의 뜻에 따라 살기를 혼신을 다해 촉구하였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생각해봐도, 무슨 대단한 권세나 명망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남루한 모습의 사나이가 홀홀 단신, 광야에서 누구도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는 철벽같은 현실에다 대고 외치는 일이 무슨 기대할 만한 반응과 성과가 있을 성싶을까 합니다. 굳어질 대로 굳어져 버린 생각과 마음을 그가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나선다고 해서 고쳐지고 변화하겠는가 하는 회의가 들 법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이러한 들판에서의 외로운 육성은 급기야 병들고 시들어가던 시대를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서서히 오랜 잠에서 깨어나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례요한을 따르는 무리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으며, 그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신은 깊은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로구나, 새로운 마음을 먹고 내가 사는 근본을 바로 세워야겠다" 하는 영적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일어납니다. 현실의 조건과 상황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인 일이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으로 파고드니 가능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의 육성을 들은 모두가 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이 휘몰아치는 역사를 감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들 다 하는 대로 그냥 따라 살지 자기가 뭐 대단한 존재라고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은 채 들판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고 있느냐는 비아냥 속에 세례요한을 정신이상자로 몬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를 몰아댄 사람들이 이름 없는 무명의 백성들이 아니라, 당대의 최고 지식인들이자 "내로다"라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니 문제는 그야말로 심각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정신이상자가 아니라, 귀신이 들렸다는 헛소문과 악담을 퍼부어 대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요한을 둘러싸고 한 쪽에서는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고 하는 예수님의 극찬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과, 다른 한쪽에서는 "귀신 들린 자"라고 보는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로 갈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당대의 이스라엘의 정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던 이들이 어떤 형편에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이스라엘의 정신적 황폐함을 지적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담긴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그렇다면 세례요한과는 달리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며 사람들과 즐거이 어울리는 자신을 가리켜서는 또 어떻게들 이야기하는가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봐라, 저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로 어울려 지내는 자가 아니냐?" 이래도 탈이요 저래도 문제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좋은 이야기를 해도 마음을 닫고 있는 한, 어떻게든 비난할 구실만을 찾는 사람들의 정신적 현실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례요한과 나사렛 예수의 말씀, 그 삶 속에 담겨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이동풍(馬耳東風)이자 우이독경(牛耳讀經)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러한 마음의 고질병을 놓고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의 비유를 들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장터에서 아이들이 놀면서 때로는 피리를 불어 잔치의 흥겨움을 흉내내고 때로는 곡을 하며 장사지내는 슬픔을 따라 하기도 하는데, 도통 같이 노는 상대가 흥겨워하지도 않고 가슴 아파 하지도 않고 맹숭맹숭 내지는 시큰둥하고 있는 것이 꼭 이 마음이 꽉 막힌 세대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같이 즐겁게 장단 맞출 때에는 거기에 맞춰 가면서 가령, "춘향과 이도령은 어느덧 일년이 쏜살같이 지나가니 부끄러움은 멀어지고 애정은 점점 깊어갈 때 천하가 태평- 허니" "얼쑤, 좋다!" 해야 하고, "아이고 데이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별리(別離)의 찢어질 듯한 가슴으로 서럽게 곡을 하면 "어허야 데헤야" 하면서 비장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곡절 저런 고비 넘어가며 끈끈히 맺히고 터지듯 풀리는 생명 본연의 가락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슬픔과 기쁨에 화답할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너는 너", "나는 나" 하면서 살다보면 이렇게 됩니다. 상대의 인생사가 품고 있는 가려진 사연에 매정하고, 상대의 환희를 함께 나눌 마음의 여지를 상실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세례요한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고단함과 정신적 황폐함에 고뇌하면서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하고 하늘을 향해 뜨거운 기도를 드린 그 통절한 심정을 모르며, 나사렛 예수께서 사람들의 아픔을 정이 듬뿍 담긴 몸짓으로 짚어내면서 그곳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솟구치게 하는 감격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제대로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며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나사렛 예수께서 고달픈 인생사를 지내온 사람들을 위로하며 이들과 함께 즐거운 잔치의 자리를 펴는 것을 영 비딱하게 바라본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는 "먹지 않는다/먹는다"만 보이지 요한과 예수의 마음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기원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욕망을 채우는 일에 바쁘고 자기 과시를 하는 작업에 열심이며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에 힘을 다할 뿐이니 상대의 삶이 안중에 있을 턱이 없으며, 시대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며 하늘을 향해 간구와 절규를 할 사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은 신나게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어야 하는지 아닌지 모르고, 서럽고 서러운 곡을 들어도 울어야 하는지 어쩐지 모르게 되는 법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며, 웃는 자와 함께 웃는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는 것을 경멸하며 웃는 것을 시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필요에 응답할 줄 모르며, 생명의 섬세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인간 생명의 현실에 대해 언제나 마음을 쏟으시면서 아파하는 자에게 위로와 치유를, 약한 자에게 힘과 용기를, 헤매는 이에게 지혜와 인도하심을 그리고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의 활력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으며 애통하게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영혼이 메마르고 가슴이 막힌 사람으로 지낸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삶에 생명의 가락이 감동일 줄 길이 없고, 사랑의 혈맥이 흐를 방도가 없습니다. 걸핏하면 따질 줄이나 알고 조금 약점이 보인다 싶으면 추궁할 줄이나 알며 교만에 빠져 남에게 핀잔을 주거나 무시하는 일로 자기 우월감을 느끼는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기도가 나올 리 만무하며 함께 어울리며 생명의 축복을 나눌 수 있는 여지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사의 애환(哀歡)을 자신의 애환처럼 나누시는 하나님과 마음으로 진실하게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비극이며 이야말로 불행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날이 갈수록 결국 홀로 남게 될 것이며 날이 갈수록 그 영혼은 진정한 기쁨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가게 되는 법입니다. 신앙이란 그래서 우리를 <참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타자의 슬픔 앞에서 진정 가슴이 저미고, 기쁨이 있는 곳에서 마음이 흡족하며 고난 속에 있는 이웃과 하나의 마음으로 연대하며 희망으로 생명의 새로운 기력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야말로 인간이 치르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며, 역사가 통과하는 고난을 함께 감당하기 위해 자신을 거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이 시대가 갈망하는 꿈을 위해 하늘로부터 받은 자신의 은사를 즐거이 내어놓을 줄 아는 이가 됩니다. 그래서 어디선가 애곡(哀哭)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 아파하며 함께 울고, 어디선가 피리 소리에 맞추어 생명의 축제가 벌어지면 모든 격식을 훌훌 벗어 던지고 마음을 다해 함께 하려는 이의 모습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런 이에게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솔직하고 자유롭게 고백할 것이며 그런 이에게 우리는 자신의 기쁨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나누려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못남도 그런 이에게는 핀잔이 되지 않고 우리의 잘남도 그에게 시기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약함이 그에게 공격의 목표가 되지 않고 우리의 축복이 그에게 우스운 것으로 경멸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함께 하는 사랑의 마음이 충만하며 그로써 우리의 삶이 보다 풍부해지고 보다 깊어지며 보다 감격적인 것이 될 것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슬퍼해 주며 진정으로 기뻐해 주고 진정으로 격려하며 진정으로 축복해주는 심사와 만나 우리의 생명이 보다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하는 감사가 있게 될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 뿜어내는 생명의 힘은 바로 이러한 감사가 우리에게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입니다. 또한 우리의 이웃에게 그런 감사를 체험하도록 만들어 나갈 존재가 되는 것에 그 생명의 목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시작하는 설>의 축제가 그런 생명의 목적을 이루는 날의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축제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그런 능력을 함께 받아 기뻐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영혼의 나이가 더욱 새로워지는 감격이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추니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도다"하는 환희가 그득한 나날이 되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