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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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2월 15일 토요일 오후 12시 17분 40초
제 목(Title): 퍼온글/ 중세기독교철학에 관한 몇가지 


*교부철학 검색해보면서 본 자료들입니다. 
정확한 출처는 잘 모르겠습니다.*

교부철학(敎父哲學)

원시 기독교가 사도 바울(Paulus)로 말미암아 체계를 갖춘 후 새로운 기독교적 
철학이 발생하여 2세기경부터 7, 8세기까지 계속된다. 이를 교부철학이라 
부르는데, 그 까닭은 교회에서 인정받은 철학적 교양이 풍부한 기독교 신도들이 
당시 기독교에 박해를 가한 이교적 로마 제국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교회를 
육성하기 위하여, 또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의미에서 받은 
그들의 명예스러운 존칭(敎父, patres ecclesiae)에서 유래한다.
기독교 사상이 아직도 이 시대에 넘어오기 이전 즉 사도 바울 같은 순수한 
신도들만이 퍼져 있었던 시대에는, 철학은 지상의 지혜라 하여 멸시되었고, 
하나님의 지혜를 계시로서 가르쳐 주는 신앙이야말로 참된 진리라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켜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열렬했던 그들의 신앙심에도 동요가 일고 신앙의 진리성에 대한 
인간적인 회의와 반성 그리고 사변이 움트기 시작했다. 원래 기독교적 진리는 
게시로 나타난 초자연적 진리로서 인간의 이성 능력이 도달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교도의 나라 로마 제국의 힘의 박해를 무자비하게 받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는 한편 그들의 진리와 신자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신앙의 변호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는 소위 
변호서를 로마 황제에게 제출하게까지 되었다. 이것이 교부 철학의 발단이 된 
것이다. 그들은 신앙의 진리를 단순히 계시를 통해서만 파악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도 파악해야 하였으며, 또 그러지 않고는 이미 변모한 
시대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방편으로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스토아 철학도 부분적으로 
흡수하였는데,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관은 가장 적절한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신플라톤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기에서 교부의 명칭은 후에 
주교 또는 승려, 심지어는 펑신도에게도 적용되었는데, 전통을 지키면서 
저술하는 교회에 의해서 승인받은 사람이면 다 교부라고 통칭하였다. 그러나 
교부로 불린 사람들의 범위 구별은 아직까지 명료하지 못하다.  (강성위 역, 
서양 철학사, 이문 출판사, 1988, p. 387 이하)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의 철학˙사상 등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 
고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저술로써 설명하고, 성스러운 
생활을 함으로써 신도의 모범이 된 사람들을 교부라는 이름으로 존중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이들 교부의 저술이 정통교리의 권위로서 후대에서도 인용되었다. 
넓은 뜻으로는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를 통틀어 교부라고 하기도 하는데, 
교부의 저술에 대한 연구는 교부학(敎父學)이라고 한다. 교부는 대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예에 정통한 사람들로서 그 중에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도인 
사람도 있고 커서 개종한 사람도 있지만, 어느 경우이든 고대문명의 유산, 특히 
시인과 철학가의 학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스도교는 처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단일성 때문에 고대 
이교문명과는 전혀 이질적인 원천에서 나온 종교로 등장하였지만, 차차 고대 
이교세계까지 교세를 넓힘에 따라 고대문명, 특히 그리스 철학사상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들이 교부인데, 이들 
교부들이 고대문명 속에서 불멸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진리 그 자체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여, 그리스도 사상에 이를 섭취하였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궁극적으로 이성으로써는 해명될 수 없는 신비이기는 
하지만,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교리 그 자체도 이성적인 
구조(構造)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그리스도 사상이 하나의 종합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고, 그 위에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학체계가 세워진 것이다. 
교부시대는 2~7세기 또는 8세기까지에 이른다. 그리스 교부란 그리스어(語)로 
저술활동을 한 동방의 교부를 말하고, 라틴 교부란 라틴어로 저술활동을 한 
서유럽의 교부를 말한다. 19세기에 J.P.미뉴가 편찬한 《그리스 교부집성》 
162권과 《라틴 교부집성》 221권은 이 방면에서는 가장 총괄적인 것이다. 
그리스 교부는 사변적(思辨的)이어서,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궁극의 철학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명하려 하였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통일성이 없이 혼재하고 있었지만, 얼마 후에는 조화된 그리스도 
사상으로 통일되어 갔다. 그리스 철학의 여러 학파를 거친 다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접촉한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 아테나고라스는 “이것만이 유일한 
참된 철학”이라고 부르짖은 2세기의 교부이며 호교가였다. 3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의학교(敎義學校)를 지도한 클레멘스 오리게네스가 있고, 
4세기에는 카파도키아 지방에서 활약한 그레고리우스,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그리스 교부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라틴 교부로는 그 
유명한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말한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푸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아우구스티누스 등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명한 
로마의 변론가인 그는 이교도적 교양으로부터,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고백록》을 썼다. 
이것은 이교문명으로부터 그리스도교 문명으로 옮겨가는 시대의 고뇌와 환희를 
한 사람의 내면의 역사로 부각시킨 것으로서, 정신사에 있어서 중요한 기록이 
되어 있다. 그가 여기에서 그려낸, 인간의 내면의 지주(支柱)가 되고 빛을 
밝혀주는 ‘내면의 신(神)’의 사상은 그 후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상을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   <닫기> 
아우구스티누스(354.11.13~430.8.28)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 사상가.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 성인(聖人). 그의 
생애는 주요저서라고 할 수 있는 《고백록(告白錄) Confessions》에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긅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新)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主敎)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만족(蠻族) 침입의 위험을 직접 당하면서 죽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윤리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며, 윤리적인 선악은 그 사랑이 무엇으로 향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였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義人)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惡人)이라고 하였다.   <닫기>

스콜라철학
스콜라(schola)란 말은 라틴어로 학교의 뜻을 가진다. 즉 서기 4세기부터 
서유럽 기독교의 모든 수도원과 주교좌 성당에 마련된 부속 학교를 가리킨다. 
흔히 스콜라 철학을 고대 그리스 사상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집성·반복한 것이라고 보는 이가 많으나, 과거의 철학에서 많은 자료를 
활용하고 평가했다고 해서 스콜라 철학의 고유한 독립성마저 잃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스콜라 철학은 순전히 신학적 제약을 받은 철학이라고 보아 
'신학의 시녀'라고만 알고 있는 이도 있으나 이것 역시 편견에서 오는 그릇된 
생각이다. 스콜라 철학의 대표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을 완전 독립된 
학문으로 알았고, 이 철학과 신학의 조화적인 관계를 수립하였다. 역사적으로 
스콜라 철학은 중세적 정신 생활의 초점을 이룰 만큼 모든 전문 분야, 즉 예술, 
문학, 정치론까지에도 침투되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중세적 
세계관의 바른 모습을 볼 수 없다. 현재 카톨릭 교회에서는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안에서 가장 완성된 중세의 스콜라 사상의 종합을 
발견하고 있다.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무엇보다 먼저 
인식론을 수립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본체론, 즉 
유(有, ens, being)의 원리를 규정하고 해석하며, 또 이미 증명된 원리를 
근거로 하여 인생 및 우주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노력한다. 그래서 스콜라 
철학의 논리학, 심리학, 우주론 역시 형이상학과 긴밀히 연결된다. 이런 
견지에서 형이상학은 다른 철학 부문의 기초이며 중심으로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그 보편성을 가진 형이상학 때문에 '논리학적으로 
형성되는 전체 철학'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강성위 역, 서양 철학사, 이문 
출판사, 1988, p. 466 이하)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철학. 중세 초기에 샤를 
대제(大帝)는 유럽 각지에 신학원(神學院)을 설립하고 학문육성에 진력하였다. 
스콜라학의 명칭은 이 신학원 교수(doctores scholastici)에서 유래하며, 그 후 
중세의 신학원과 대학에서 연구되는 학문을 널리 스콜라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그 가운데 한 부문인 철학 분야이다. 스콜라학은 이 
때문에 중세의 신학(神學) 철학 연구 전반을 총괄하는 것으로 매우 다방면에 
걸친 것이지만 거기에는 전체적으로 공통되는 몇 가지 특징도 있다. 그것은 
중세의 학문연구방법(스콜라학적 방법)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에 의하여 
중세철학의 본연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규정되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중세의 학문 연구는 대체로 성서와 교부(敎父)의 저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자, 기타 저술가의 저서에 대한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 저서의 독해 주석 해석이 그 첫째 작업이었다. 이 무렵 성서는 
신(神)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성서의 권위). ② 신의 말은 
먼저 신앙에 의하여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만 ‘신앙’은 인간이 거기에 
내포되는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새 사람으로 재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라는 것이 스콜라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 때 신앙과 
이해(또는 이성)는 서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요구하면서도 한쪽이 다른 한쪽에 
용해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바로 중세철학을 
구성하는 두 요인이다. 따라서 중세철학을 ‘신학의 하녀’라 하여 한편에 대한 
예속관계로서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스콜라철학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예속되는 곳에서는 상실되며, 긴장관계에 있는 양자의 종합에 의해서만 
스콜라학이 성립된다. 스콜라학의 다양성은 이 종합의 다양성에 있다. ③ 
교부와 철학자의 저작은 이를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하나의 문제점에 따라 
참조되는 여러 전거(典據)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설(說)이 수집 정리되었다. 
12세기 초, 페트루스 롬발드스의 《명제론집(命題論集)》은 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아벨라르두스는 이들 여러 견해를 하나하나의 논점에 
대하여 긍정측과 부정측의 대립하는 양자로 분류하는 방법(그렇다와 아니다의 
방법)을 도입하였다. 13세기의 슴마(완전한 단일로서 간결한 총괄)는 이들 
대립하는 여러 견해 사이의 조화와 종합의 시도로서 여러 영역에 관하여 
이루어진 여러 설의 집대성이며, 참으로 학술의 종합이라고 할 만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은 그 중 가장 저명한 것이다.
[초기] 샤를 대제 시대부터 12세기까지이며 신(新)플라톤파 철학을 도입하여 
가짜 디오니시오스(Dionysios)의 번역에 의하여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스코투스 
에류게나, 신앙과 이성(理性)의 관계를 명확히 한정시키고 스콜라학의 방법을 
확립하여 ‘스콜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켄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神)의 존재에 관한 안셀무스의 증명은 유명하다.
[전성기] 13세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서(自然學書)를 아라비아 철학에서 
이입함으로써 종래의 신학으로부터는 독립된 지적 연구(知的硏究)가 일어난다. 
이 새로운 연구를 대폭적으로 채용하고 게다가 이것을 전통적인 스콜라학의 
체계 속에 혼연히 융화시킨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원리적인 독립성이 유지되면서 전체는 신학의 체계로서 종합되었다. 이에 비해 
보나벤투라는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켰다.
[말기] 14세기로, 신앙과 이성과의 조화가 점차 상실되었다. 
유명론자(唯名論者) W.오컴,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 M.J.에크하르트가 
대표적이다.   <닫기> 
토마스아퀴나스(1225?~1274.3.7)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신학자.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 출생. 성주(城主)의 아들로 처음에 나폴리대학에 입학했으나 
설교 및 학문연구를 사명으로 하는 도미니코회(會)에 들어가 파리와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사사하였으며, 그 동안에 사제(司祭)가 되었다. 
1252년 파리대학 신학부의 조수로 연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성서 및 
《명제집(命題集)》의 주해에 종사하였고, 57년 신학교수가 되었다. 59년 이후 
약 10년 간 이탈리아 각지에서 교수 및 저작에 종사, 68∼72년 재차 
파리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 나폴리로 옮겼다. 74년 리옹 공의회(公議會)에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는데, 그 종류는 그가 대학교수 및 수도회원으로서 행한 각종 활동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선 《신학대전(神學大全)긕umma Theologiae》(1266∼73)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긕umma de Veritate Catholicae Fidei Contra 
Gentiles》(59∼64) 등의 교과서적, 체계적 저작을 꼽을 수 있으며, 《진리에 
대하여》 《신의 능력에 대하여》 등 그가 교수로서 지도한 토론의 기록과 
성서의 주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 그리고 프로클로스, 가짜 
디오니시오스, 보에티우스 등의 저작 주해 및 신학과 철학의 갖가지 문제에 
대하여 논한 소논집(小論集) 등이 있다. 그는 ‘스콜라철학의 왕’이라 불리고,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 또 ‘공동(共同)의 박사(Doctor 
Communis)’라는 존칭이 주어졌다. 그는 《대이교도대전》의 권두에서 
예지(叡智)의 탐구는 모든 인간의 영위(營爲) 중에서도 가장 
완전˙고귀˙유익하여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이라 찬미하였지만,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할 말을 고른다면 ‘끊임없는 예지의 탐구’ 바로 그것이다. 
그에게 있어 예지의 탐구란 신학˙철학의 어떤 말로 불리든 간에, 주체 외부에 
체계 혹은 작품을 쌓아올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궁극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자기실현의 발걸음이었다. 거기에 
토마스 철학의 ‘실존적’ 성격이 있다.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반복도, 
그리스도교화도 아니며,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를 거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철저한 경험적 방법과 
신학적 사변(思辨)을 양립시켰는데, 이와 같이 독자적인 종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창조(創造)의 가르침에 뿌리박은 존재(存在)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학문영역에서 비길 데 없는 종합화를 이룩함으로써 중세사상의 완성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가 신(神)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 
자율(相對的自律)을 확립한 일은 곧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는 
인간중심적˙세속적인 근대사상을 낳는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인(近代人)이며, 그 영향은 그의 이름을 붙인 학파를 훨씬 
초월하여 현대 사상 전역에 미치고 있다.   <닫기>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식론과 그 영향

 

                                       

                         목        차

 

  1. 중세에 있어서의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의 위치

  2.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관과 인식론-영혼과 지성 개념을 중심으로

     1) 영혼 개념

     2) 지성 개념(능동/수동 지성)과 인식론

        (1)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

        (2) 물질적 실재에 대한 인식 

        (3) 비물질적 실재에 대한 인식

        (4) 지성의 두가지 활동

  3. 아퀴나스 이후

 

 

 

1. 중세에 있어서의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의 위치

 

        중세 철학을 크게 교부 철학의 시대와 스콜라 철학의 시대로 나누었을 
때, 스콜라 철학 시대의 정점은 13C 경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이 변화함에 따라 신학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요구받았는데, 이 시기에 출현했던 뛰어난 신학자, 聖 토마스 아퀴나스 
( Saint. Thomas Aquinas, 1225~1274)가 바로 그같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냄으로써 과거 교부 철학의 시대에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그랬던 것 처럼 
교회는 다시 한번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아퀴나스의 
인식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첫째로는 십자군 운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사건이 
갖는 정치적 군사적 의미 때문에 중요했던 것은 아니고, 문화적 측면에서 끼친 
영향 때문에 중요했던 것이다. 십자군 운동은 중세 기독교 문화가 유대교 문화, 
이슬람교 문화 뿐만 아니라 아랍 철학자들에 의해 보존, 연구되어온 고대 
그리스의 고전적 문화와 만나도록 해 준 사건이었다. 기독교 문화가 이 3 
문화와 마주치게 되었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기독교 문화 내부에 변화가 
초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간의 조우는 그 문화 안에서 자기 
반성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탁발 수도회가 일반 민중에게로 침투하였던 사실을 들 수 
있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평신도 운동이 그것인데, 이것 역시 중세 
기독교 문화에 있어 새롭고도 위협적인 바람이었다. 왜냐하면 평신도 운동이란 
말 자체가 폐쇄적이고도 정적인 카톨릭의 히에라르키아 (계층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적 요소였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수많은 反 교회적 종교 운동의 원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배경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 전집의 
발견을 꼽을 수 있다. 물론 당시 이전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중세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기는 했으나, 이제는 완전한 하나의 체계로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이 왜 특별한 의의를 가졌을까 ?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이성에 대한 이데아, 즉 신의 절대적 
우위를 강조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철학이 신학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한에서만 유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발달한 이슬람의 자연 과학의 유입 
등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로 인하여 중세인들은 기존에 감히 의심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하나 둘씩 의심을 품게 되었고,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를 더이상 절대적인 권위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 전집이 발견되었다는 역사적 사건이 갖는 
의의를 우리는 쉽게 추론해 볼 수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을 방법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체계라는 새로운 대안적 가능성을 모색하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이제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이 완전히 구시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아퀴나스에 의해 새롭게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가 신학을 지배하게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과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긴장 관계를 더 자세히 
살펴 보면 그것은 인식론에서 잘 나타나게 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 
경험에서 출발하여 세계와 자연을 관찰하고, 여기에서부터 신적인 것을 
추론해낼 수 있다고 보았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직접 직관을 중시하여 자기를 
신의 중심에서 보며 여기에서 세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은 
신이 우리 인식의 맨 처음이냐(아우구스티누스) 아니면 맨 
끝이냐(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로 귀결된다. 신이 우리 인식의 맨 처음이라고 
보는 견해는 직관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모든 인식은 
신적인 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이 입장은 프란치스코회의 입장과 
상당히 일치한다. 후자, 즉 신이 우리 인식의 맨 끝이라고 보는 견해는  
도미니코회의 아퀴나스에 의해 대표된다. 이것은 이성 혹은 지성 중심주의적 
입장이며, 인식 행위에 있어 신의 직접성을 배제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인식은 
신의 일(役事)인 유한한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신으로 도달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프란치스코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유지된다. 즉 신에 대한 
인식도 다른 모든 인식과 마찬가지로 감각 경험에서 출발해야 하고, 따라서 
이성적 추론에 의해 신에게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각 
체험에서 이른 귀결들은 교회의 권위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위의 두가지 입장은 결국 신율적 인식론과 교회의 권위로 보완되는 
자율적 인식론과의 차이에 다름 아니다. ]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등장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코회가 배출한 신학자로서 무너져가는 교회의 권위를 
수호하라는 교황의 특명을 받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에 끌어들여, 
현실에 적합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했던 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중세의 봉건적 계층 질서가 변하기를 원치 않는 
교회의 입장에 들어맞을 뿐더러 중세 신분 구조의 당위성을 설명하기에 
적합함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질료의 상대적 
관계에서 생겨나는 위계적 구조질서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학적 
이성으로 실재론을 지키면서, 동시에 교회를 비판한 유명론에 대한 대응 논리를 
만들고 새로운 호교적 전통을 창시하고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였던 것이다. 
또한 동시에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꾀하기 위해서  신과 인간 이성간의 영역을 
서로 분리함으로써 신앙과 이성이 무모순 관계에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 또 
인간 이성이 본질적으로 비신앙적이지 않고 신에 대한 믿음인 신앙 역시 
비이성적이지 않으므로 결국 신앙과 이성은 궁극적으로 최고의 존재자인 신 
안에 공통의 뿌리를 두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폴 틸리히는 이같은 아퀴나스를 
두고 '조정적(調停的) 신학자'라고 파악하였다. ; 그때 그때의 역사나 
교회사로부터 받은 이해 가능한 여러 범주들의 도움을 빌어서 부름의 메세지를 
매개 혹은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던 신학자였다는 뜻에서인데, 이것은 스콜라 
철학에 있어서의 아퀴나스의 역할을 적절히 표현한 말이 아닌가 싶다.  

2. 아퀴나스의 인간관과 인식론(영혼과 지성 개념을 중심으로 

  

  1) 영혼 개념

        아퀴나스는 창조된 것들, 즉 피조물들의 위계 구조 속에서 정점에 있는 
것은 천사라고 보았다. 천사는 비물질적이며 비질료적이라는 단순성을 가지는 
존재이다. 여기서 비물질적이란 말은 사실 비질료적이란 말과 동의어인데, 
왜냐하면 질료와 형상의 합성은 오직 물질적 실체에만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성이라는 개념은 완전성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확실하게 신과 구분되어 신의 아래에 있는 존재일 수 
있는 근거는 천사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본질과 실존이 일치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위계 구조 상에서 볼 때 천사의 아래에 있는 인간 역시 영혼을 
가지므로 비질료적 존재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 육체로 인하여 비물질계에 
속하지는 못하고 물질계의 정상에 위치한다. 또한 천사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인 
인간은 당연히 본질과 실존이 구분되는 존재이다. 그런데 아퀴나스의 인간 
영혼에 관한 이론은 기존의 해석과는 큰 차이가 있다. 플라톤으로부터 
플로티누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기까지의 전통에서는 인간 영혼은 
영적 실체라고 이해해왔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수용하면서 인간의 영혼이 신체의 형상이자 능동성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영혼과 신체의 결합을 곧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환원시킨 그의 인간 영혼론은 
전통 신학의 대표자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즉 영혼이 소멸할 수 있는 다른 
질료적 형상에 동화되어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영혼이 독립적 실체일 수 
있는가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과는 달리 아퀴나스는 인간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지 않았다.  

        비단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물은 육체의 형상으로서 영혼을 소유한 
것으로 아퀴나스는 간주한다. 이때의 영혼은 고대 희랍의 프쉬케 개념을 
연상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 개념 즉 영혼은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극히 자연적인 실체에 다름아니라는 개념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희랍에서는 프쉬케를 가진다는 말이 정신(mind)을 가진다는 의미보다는 생명을 
가진다는 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은 육체의 본질적이고 유일한 
형상으로서 존재하며 육체에 직접적으로 결합된 지성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각각의 인간은 영혼 안에 자신의 고유한 지성을 소유하며, 그 영혼은 
파괴되거나 소멸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슬람 철학자인 
아베로에스의 이론, 즉 모든 사람을 위한 오직 하나의 지성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반박하고자 하였다. 아퀴나스의 이러한 반박은 각 인간 영혼의 고결함과 
개별성을 보호하고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영혼 불멸을 위하여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다.

         끝으로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 영혼이 갖는 힘에는 몇가지 종류가 
있다. 그것은 식물적인 힘, 감각적인 힘, 욕구하는 힘, 운동하는 힘, 그리고 
지성적인 힘인데, 이 중에서 순수하게 지석적이고 의지적인 힘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도 영혼과 함께 남아서 영혼과 천사 등에 대해 직접적인 
인식을 소유하는데 기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나머지 힘들은 영혼과 육체의 
합성에 의존하는 힘으로서 인간의 육체가 죽으면 소멸해버릴 힘들이다. 

 

  2) 지성 개념( 능동 지성/ 수동 지성 )과 인식론

      (1)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퀴나스의 인간 영혼 개념은 필연적으로 
지성과 인식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성( intellect ) 혹은 오성( understand ; 
intellectus )은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흔히 영어의 
이해하다( understand )로 번역이 되지만, 개념상으로는 생각하다( think )에 
더욱 가깝다. 아퀴나스는 지성을 능동 지성( intellectus agens )과 수동 지성( 
intellectus  possibilis )으로 구분하여 그 활동을 설명한다. 

        능동 지성은 개별적 감각 경험에서 보편적 관념들을 추상해내는 인간의 
능력이며  수동 지성은 능동 지성을 통해 추상했던 관념들의 저장소이자 그 
관념들을 사용하는 능력이다. 능동 지성 개념은 중세 철학사에서 보통 
신비적이거나 신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아퀴나스에 와서는 
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 아퀴나스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개념을 
수용하지 않고, 항상 질료와 형상이 결합하여 실체를 이룬다고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인식론에 있어 능동 지성을 
가정해야만 했다.(아퀴나스의 인식론에 있어 능동 지성은 매우 중요하므로 
여기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 모든 인간은 능동 지성을 영혼 안에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천사에게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주는 자연적인 
힘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이 신체의 직접적인 형상인 탓에 인식 원리를 
오로지 감관을 통해서만 구성할 수 있다. 즉 인간 지식은 질료적인 사물들과 
그에 대한 감관, 또 그에 대한 지성 이 삼자간의 협력의 산물인 것이다. 

 

     (2) 물질적 실재에 대한 인식

        아퀴나스는 인식론에 있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대상 사물들로부터 
출발하는데, 바로 이 점이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와 대조되는 점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1.에서 ) 말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식에 있어 직접적 직관의 
가능성을 확신하여 그로부터 물질적 세계로의 인식으로 내려오는 하향적 관점을 
취했기 때문이다. 다시 능동 지성으로 돌아가서 보면, 감관에 작용한 감각적 
대상들은 신체적 질료는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질료성과 개별성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를 상당 부분 수용한 결과로 
보여지는데 ,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찌기 자연 대상에 관한 지각은 
물질적인 어떤 것이 영혼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저 형상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장미를 볼때, 
장미가 내 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장미의 像 혹은 에이도스가 
지각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무튼 여전히 질료성과 개별성의 흔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부터 보다 보편적인 형상을 추상해내는 능력이 바로 능동 지성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학 대전의 제 84문 제 4조의 respansio 를 통해서 
그같은 아퀴나스의 견해는 플라톤과 아비세나의 주장에 대한 반박임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의 경우, 감각적 실재의 형상은 질료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물질적 질료는 돌의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돌이 되고, 우리의 지성이 
그 돌의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돌을 인식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같은 
플라톤의 견해에 대해서 형상이 질료 없이 존속함은 감각적 사물의 본성에 
어긋난다고 반박한 아리스토텔레스를 피해서 아비세나는 능동 지성으로부터 
지성적 에이도스가 우리의 영혼 안으로 , 감각적 형상은 물질적 질료 안으로 
흘러들어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비세나의 생각은 우리들의 지성적 
에이도스가 질료로부터 분리된 형상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점에서 결론적으로 
플라톤과 같은 맥락에 놓여있음을 아퀴나스는 간파하였다. 그리고  그같은 
견해는 인간의 영혼이 신체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만약에 영혼이 이미 질료로부터 분리된 형상만을 
받아들이고, 감각을 통해서는 에이도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혼과 신체가 
결합해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또 플라톤-아비세나의 주장이 참이라면 
선천적인 시각 장애자도 빨간 색이 어떤 색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같은 논리를 통해 아퀴나스는 우리의 영혼이 지니는 지성적 
에이도스는  감각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지 독립적 형상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즉 신성한 정신 내의 이데아들에 의해 영혼이 물질적 사물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3) 비물질적 실재에 대한 인식

        아퀴나스는 인간의 비물질적 실재에 대한 인식 가능성에 대하여 
과감하게도 부정을 하였다. 신학 대전의 제 88문 제 1조의 respansio 에서 
말하기를, 비물질적 실재는 그것에 관해 심상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추상을 통해 인식되지 않으며, 능동 지성이나 수동 지성이나 모두 
현세에서는 물질적 질료에로만 지향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모든 인식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아퀴나스 인식론의 기본 개념을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능동 지성은 물질적 질료로부터 현실태로 인식 가능한 
것을 만들고, 수동 지성이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따라서 현세의 이 상황에서는 지성은 그 자체로 비물질적 
실재를 인식할 수 없다는 혁명적인, 그러나 논리적인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성은 물질적 실재를 통해 비물질적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그는 제 2조에서 제기하고, 여기에 대해서도 부정을 한다. 그 이유는, 
물질적 실재와 비물질적 실재의 본성은 전혀 다르고, 인간의 정신적 기능도 
비물질적 실재를 파악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인간 영혼은 신체의 
직접적 형상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비물질적 실재를 아예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는 분명 사랑이나 미움, 혹은 
신에 대해 관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퀴나스의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인 인간이 소유한 영혼은, 완전히 비질료적인 
순수 형상은 아니므로 비물질적 사물을 '완전하게는' 인식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거꾸로 말해, 인간이 비물질적 실재를 완전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신체 질료로부터 분리된 사후(死後)에야 가능할 것인데, 
이때가서 인간 영혼은 물질적 실재 중 극히 일부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비물질적 실재 중 특히 신의 관념에 대해서는 1. 에서도 언급했듯이, 
완전하지 못한 인식이 교회의 권위에 의해 보완받고 지지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4) 지성의 활동

        이제 지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우선 
지성의 첫번째 활동으로서 추상 활동은, 능동지성이 가지적인 형상을 
추상해내고 수동 지성에 의해 이 가지적 형상이 받아들여지는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다. 지성의 추상 활동은 참도 거짓도 아닌 단순한 파악 또는 개념의 
산출을 결과한다. 이 추상적 인식은 우리가  보편적인 것에 의해서 비로소 
개별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감각을 통해 
형성되는 지성적 에이도스 개념'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록 구체적 대상물을 감각함으로써 지성적 에이도스를 형성하지만(즉 구체적 
대상물이 지성적 에이도스에 우선하지만), 그렇게 하여 관념 혹은 지식의 
형태를 갖추게 된 자료로써 다시 구체적 대상물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이처럼 우리의 인식이 개별적인 것을 감각하여 보편적인 것으로 
지성이 인식한 후 그것으로부터 다시 개별적인 것을 파악한다는 이론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겼던 과제-개별자로부터 보편자를 파악하는데, 어째서 
우리는 여전히 개별자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를 해결했던 것이다. 즉, 
'동물을 불명확하게 아는 것은 동물을 동물인 한 아는 것이다( 구체적 
대상물로부터 지성적 에이도스를 형성하는 단계-필자註). 그런데 동물을 분명히 
구분해서 아는 것은 동물을 이성적 동물이거나 비이성적 동물의 명목으로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인가 사자인가 분명히 구분해서 아는 것이다.(형성된 
관념을 다시 구체적 대상물에 적용하는 단계-필자註) 우리들의 지성은 인간을 
알기 전에 동물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들에게 개별적인 
것의 인식은 보편적인 것의 인식에 선행한다. 이것은 감각적 인식이 이성적 
인식에 선행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감각에서나 이성에서 보다 일반적인 대상이 
덜 일반적인 대상의 인식보다 선행한다.'  (신학대전 제85문 제 3조 respansio)

        다음으로 지성의 두번째 활동은 판단 활동으로서, 이것은 동사 be ( 
~이다 )에 의해 단순한 파악을 연합하거나 구별하는 것이다. 즉 사태들이 
실재로 연결 또는 분리되어 있는 그대로 한 판단이 본질적 개념들을 연결 또는 
분리시킨다면 그 판단은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판단 결과와 실재와의 일치 여부가 진리의 기준이 된다. 이를 두고 아퀴나스는 
'진리란 사고와 존재의 일치다( vesitate est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 신학 대전 1, 16-1)' 라고 간결하게 정의하였다. 이같은 지성의 판단 활동에 
대해서 아퀴나스는 신학 대전의 제 85문 제 5조의 respansio 에서 대략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인간의 지성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과정에 놓여있는 
탓에, 한번만에 (추상 활동)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 
그래서 추상 활동을 통해서 대상 사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다음에 속성과 
우유성, 존재 방식, 상황 등을 알게 되는데 여기에서 지성이 요소간의 
결합-분리와 긍정-부정적 판단을 하고 다른 판단으로 추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판단 활동이 요구됨).'

 

 

3. 아퀴나스 이후 

 

        아퀴나스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속해 있던 도미니코회와 전 
카톨릭 교회에서는 토미즘을 둘러싸고 처절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한다. 특히 
아퀴나스 이론과 대립관계에 있던 프란치스코회는 아퀴나스의 주된 적대 세력화 
하였으며 특히 1277년의 대정죄 (Condemnation)에서 정죄받은 217개 명제 중 
아퀴나스의 명제도 몇가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퀴나스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 의해 '교회의 빛'에 비유되었던 그의 사상의 진가는 
머지 않아 발휘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1322년 교황에 의해 諡聖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1879년에는 마침내 토미즘이 전체 카톨릭 교회의 공인된 
철학으로 격상되었으며, 1931년 교황청의 지시에 의하여 철학 및 사변 신학은 
아퀴나스의 학설과 원리를 따라야만 한다고 명시되었다 한다. 이와 관련하여 
19-20C의 토미즘은 新 스콜라 학파를 중심으로 네오 토미즘이라는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시적인 측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평가하는 것 
못지 않게, 철학사에 있어서는 그의 사상이 어떻게 재현되었는지를 살펴 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우선 아퀴나스의 인식론은 경험주의적이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루었던 중세의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진리의 인식을 내면에서 추구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위에서도 살펴 보았지만 인간 인식은 인간의 외부, 특히 
경험될 수 있는 물질적 사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던 그의 인식론은 어떤 
형태로든 근대 경험론에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아퀴나스의 인식론에서 
나타난 또 다른 특징으로 우리는 그를 통해 칸트 철학의 예비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우리의 지성이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사물의 
인식에서 보편적 개념을 추출하는 단계를 거쳐 다시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보았던 점은 칸트 인식론의 기본적 태두리가 이미 잡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즉, 칸트는 인간 정신은 감성에 의해, 외부에서 초래된 것을 재료로 
현상을 만들고, 구상력을 중개로 하여 오성에 의해 하나의 규칙 하에 정리하여 
판단한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아퀴나스의 인식론과 기본 틀에 있어 매우 흡사한 
것이다. 

 

 

 

** 참고 문헌

 

중세 철학사 (에띠엔느 질송 저, 김기찬 역, 문학과 지성사)

중세 철학사 (J.R.와인버그 저, 강영계 역, 민음사)

서양 철학사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저, 강성위 역, 이문 출판사)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잉게베르크 C. 헤넬 저, 송기득 
역,한국신학연구소) 

인간과 사고 (토마스 아퀴나스 저, 박전규 역, 서광사)

   

  --인간과 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중 제84~88문까지의 발췌본임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이글은 이왕주,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고교 독서평설》1998. 6.에서 
전문인용 하였습니다.
 
아퀴나스의 선택
 
  중세 기독교 사상을 완성한 인물로 꼽히는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하느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하고, 기독교 교리를 정교하게 체계화하는 데 평생을 
보냈다. 특히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신학에 끌어들여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는 데 힘썼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철학 체계는 이후 기독교 교회가 
공인한 유일한 체계가 되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신학 대전》은 그의 사상적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명저로, 
서양 사상사에 오랫동안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중세 철학사뿐 아니라 철학사 
전체에 걸쳐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남부 이탈리아의 
명문 백작 가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원하기만 했다면 세속적 부귀 
영화를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의 형들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아퀴나스의 선택을 달랐다. 그는 예수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며 좀더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형극(荊棘, 나무의 온갖 가시, 고난)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그의 특별한 성격은 학창 시절에 있었던 몇몇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숙부가 원장으로 있던 몬테 카지노의 베네딕트 수도원 부속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유난히 몸집이 큰 데다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던 그를, 급우들은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으로 놀려대곤 했다. 

한 번은 기숙사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에 한 친구가 아퀴나스를 놀리려고 
"야, 저기 당나귀가 날아간다."고 소리쳤다. 누구도 그 말 같지 않은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퀴나스만은 그 거대한 몸집을 돌리고 목을 쭈욱 
빼며 건물 밖의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바보스러우리만큼 
천진해 보였는지 급우들은 모두 포복절도하며 웃어댔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아랑곳없이 "거짓말하는 인간보다 날아 다니는 당나귀가 더 진리에 가까이 
있다."며 태연히 혼자 중얼거리슫 대꾸하고는 하던 식사를 계속하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동정심 많은 한 급우가 아퀴나스에게 우정 어린 제안을 
했다. 공부가 어려워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방과 후 기숙사 방에서 
따로 도와 주겠다고, 아퀴나스는 이 제안을 사양했지만 그 급우는 억지로 
우겨서 아퀴나스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학습 지진아쯤으로 생각했던 
아퀴나스가 자신보다 아니 심지어 선생님보다 더 해박한 지식을 설명까지 줄줄 
붙여 가며 풀어놓는 것이 아닌다. 어안이 벙벙해져 방을 나가려는 친구에게 
그는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이 일을 학우들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기초 교육을 마친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 부모는 몇 
번이나 간절히 말리다가 마침내 아들의 뜻을 따라 주었다. 그러나 이 고집 센 
아들이 가문의 신분에 적합한 귀족 수도원 베네딕트를 마다하고 도미니크 
수도회를 선택했을 때에는 결코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형제와 친척들까지 들고 
일어났다. 당시 도미니크 수도회는 가난하거나 몰락한 가문 출신의 사람들이 
주로 몰리는 서민적인 집단이었고, 가혹하리만큼 청빈하고 힘든 수도 생활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들이 반대했던 더 큰 
이유는 아퀴나스가 그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아퀴나스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가족 회의가 열렸고 그의 형들이 일을 꾸몄다. 
아퀴나스 가문 소유의 별장으로 이 못 말리는 막내둥이를 데리고 가 젊은 
아가씨와 함게 남겨 두고 떠났던 것이다. 아가씨는 아퀴나스 가(家)에서 시키는 
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아퀴나스 혼자 서성거리고 있는 
거실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 있던 아퀴나스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곧 벽난로에서 타오르고 있는 장작 하나를 손에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당장 이 방에서 나가지 않으면 이불로…." 혼비백산한 처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부끄러움도 잊은 채 알몸으로 뛰어나갔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그느 자신의 생애를 바꿔 놓을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193∼1280)를 만나게 되었다. 
알베르투스는 당시 이단(異端, 정통에서 벗어나 이의를 내세우는 설)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의 사상에 정통한 
학자였다. 존경하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금지되어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절묘하게 종합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열어 갔던 
것이다. 

남들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선택으로 이어져 갔던 그의 삶은 교화 그레고리오 
1세의 초청으로 로마로 가던 도중 어느 수도원에서 갑작스러운 종말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49년을 미처 채우지 못한 그의 길지않은 생애가 남긴 영향력은 
실로 막강한 것이었다.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실마리를 제공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현실적인 
철학자였다. 그는 스승 플라톤(Platon, BC 428?∼347?,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사물에는 그에 해당하는 각각의 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이데아가 존재하는 이데아 
세계의 단순한 모방이자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인간의 
영혼이 원래 이데아 세계에 살고 있었으나 육체에 들어가 지상에 머무르게 
되면서 이데아를 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인간으 이데아의 그림자인 
현실 세계를 경험하면서 점차 이데아를 상기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러한 
플라톤의 이론을 '상기설'이라고 하다. 상기설에 따르면 인간의 앎은 이데아 
세계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상기하는 것일 뿐이다.)처럼 영감과 직관을 
통해 사상을 전개해 나가는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가 지은 책을 채우고 있는 
것도 신비한 통찰이나 진땀 어린 사유의 번뇌가 아니라, 메마르다 싶을 정도로 
건조한 논리와 냉철한 지성뿐이다. 또한 그의 책 어디에도 근거 없는 주장이나 
황당무계한 논리를 펴는 대목은 없다. 그는 이성이 납득할 만한 것만을 말했고, 
논리적으로설득시킬 수 있는 것만을 주장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특징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현실 세계를 
긍정한다. 둘째, 경험과 관찰, 이성과 논리를 중시한다. 셋째, 모든 사물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목적론을 따른다는 것 
등이다. 그가 스승 플라톤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이 세상의 
현실 세계를 이데아의 바람으로 날려 버리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실재 세계의 경험보다는 이데아의 상기(想起)에 더 비중을 두는 
플라톤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독교도들에게는 이 합리적이고 깐깐한 이론가의 사상보다 약간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색채가 짙은 플라톤의 사상이 훨씬 더 손쉽게 느껴졌다. 이 
점을 놓치지 않았던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기독교 
교회의 고대 교부(敎父) 중 최대의 인물)였다. 그는 플라톤의 생각들을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펼쳐 나갔다.플라톤의 사상에는 기독교의 
교리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대목이 너무도 많았다. 이를테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플라톤이 얘기한 이데아 세계는 곧 하느님의 나라에 
해당했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들은 사사건건 기독교의 교리와 충돌하는 것 
같았다. 특히 그가 플라톤을 반박하여 이데아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한 주장은 기독교 신앙과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현실의 나라(지상의 왕국)를 
넘어서서 이상의 나라(신의 왕국)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은 신 없이도 잘 돌아가느 어떤 독자적인 
공간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이단으로 보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플라톤,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못지않게 더 
기독교적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다시 말해서 아퀴나스는 이 명민한 현실주의 
철학자에게서 터무니없는 모순이나 이단성을 발견했던 게 아니라 오히려 믿음과 
앎, 신앙과 이성이 화해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해 냈다는 말이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가 찬양했던 관조(觀照)의 삶은 인간이 가진 육체와 감정, 
이성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관찰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퀴나스가 
볼 때 관조의 삶은 하찮은 인간의 지식으로 이뤄지는 오만한 선택이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주어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신의 영광에 기여하는 겸손한 
복종이다. 

오늘날에는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여서 기독교 진리를 정교하게 
체계화시켰다는 것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이것은 숱한 파란과 고난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지극히 도발적이고 
혁명적인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퀴나스는 자신의 확신에 따라 주저 없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기독교 교리에 흡수하여 체계화하는 데 자신의 신앙과 학문적 열정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이 때문에 그는 파리 신학교 교수직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으나 그의 확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역시 그가 어떤 
협박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성과 신앙의 조화 
 
 아퀴나스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들이 기독교 교리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데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에는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야말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이성적으로 
증명해 주는 탁월한 관점임을 밝혀 낸다. 이 과정에서 그는 종종 자신의 선배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비판가지 서슴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항상 외쳤던 것은 "진리는 너의 내면에 있다. 내면의 길로 들어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우리가 진정으로 진리를 발견하려 한다면 안으로 
들어갈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던 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땅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믿음과 앎, 신앙과 이성의 관계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저런 논리로 그 절충을 
모색했지만 여전히 갈등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 속에는 
여전히 인간의 앎은 신의 은총 아래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강하게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 감각을 과감히 받아들인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종합한다. 그것은 이성과 신앙을 분리시키고 각각의 몫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그 한계와 영역을 따로 정하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 믿음과 
앎은 둘 중 어느것이 더 탁월하고 덜 탁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직분과 영역이 
다를 뿐이다.즉 무엇이 더하고덜한 것이 아니라 이성은 지상의 경험과 지식을 
위해 필요하고, 신앙은 청상의 믿음과 진리를 위해서 필요할 뿐이다. 

지상 생활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지상의 앎이란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앎은 신의 은총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 그 
모두가 일일이 은총으로 곧바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학문과 지식의 
문제에서까지 신앙과 은총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몸, 눈, 코, 입, 귀를 
통해 세상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발견하고 탐구한 
결과가 곧 앎이다. 이런 주장들은 앎이란 상기일뿐이라는 플라톤의 상기설과 
충돌하고,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와 모순된다. 

이론적인 앎과 관조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아퀴나스는 이성의 힘으로 신앙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이성으로 신의 존재까지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이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앎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가령 성부(聖父, 하느님), 성자(聖子, 예수), 성령(聖靈, 신자의 영적 생활의 
근본적이 힘이 되는 본체)이 셋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삼위 일체설)라거나 신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죽었다가 부활했다거나,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를 짊어지게 된다(원죄설)는 것 등은 인간의 이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성을 넘어서는 
신앙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아퀴나스는 신의 
은총으로 비추어진 빛에서 진리를 본다고 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동적인 
'조명설(照明說)'을 거부한다.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신앙의 힘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빛조차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아퀴나스에 있어서 이성과 신앙은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앎과 진리로 
나아가는 두 개의 다른 길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과 신앙이 서로 갈등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모두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에서 베풀어지는 은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결론 
 
 아퀴나스의 삶과 사상에서 우리는 인상 깊은 두 개의 용기를 발견한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용기다. 아퀴나스의 경우 선택의 순간에는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지만, 일단 결론이 내려지면 그 길을 후회 없이 걸어갔다. 
만약 아퀴나스가 가족의 만류나 형들의 계략에 걸려들어 자신의 선택에서 
물러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세의 역사에는 아퀴나스가 없었을 것이고 
아퀴나스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신앙에만 치우친 상태에서 이성에 대한 신뢰감을 
갖지 못한 채 더 오랜 세월동안 어둠 속에서 방황하지 않았을까. 철학이 신학의 
시녀 노릇을 했던 중세에 그나마 이성을 중시하려느 아퀴나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근대 이후의 합리적인 학문은 성립할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아퀴나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용기는 관습과 전통에 맞서 
자신이 확신하는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혁명적인 싸움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확신한 바에 따라 당시에 이단시되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과감히 받아들여 기독교 교리를 정당화시켰다. 우리에게 한 줄의 상식으로 
정리되고마는 이 일은 당시 아퀴나스에게는 목숨을 거는 혁명적 모험이었다.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 신앙과 이성, 하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중재하려 
애썻던 아퀴나스의 비상한 균형 감각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역사상 누구도 이 갈등하는 두 대립 요소들을 이토록 완벽하게 조정해 준 
철학자는 없었다. 그것은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中庸論)을 실천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중용의 실천 
역시 오랜 세월을 학업에 성실하게 정진했던 끝에 얻게 된 그의 예지(銳智)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 교부철학



敎父哲學 Patristic Philosophy

초기 그리스도교회에서 합리적으로 교리를 조직하려는 철학. 2세기경에 
시작하여 7·8세기에 이른다. 이 시대는 이교적(異敎的)인 로마문화의 시대로, 
그리스도교는 그런 이교적 세계 속에서 박해받으면서 성장해 갔다. 처음에, 
신자들은 사도 바울처럼 신앙의 진리는 신의 지혜이므로 이를 <이 세상의 
지혜>, 즉 철학으로부터 멀리하고 신앙을 순수하게 유지해 가려고 했다. 그러나 
마침내 신앙의 진리에 반성과 사변(思辨)이 첨가되기에 이르렀다. 원래 
그리스도교적 진리는 계시된 초자연적인 진리이며, 인간의 이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지도자들 중 몇몇은 그 진리와 신자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변호하고 《변호의 서(apologia;護敎書》를 로마황제에게 
제출하였는데, 이것이 교부철학의 주요한 시작이다. 그들은 신앙의 진리를 
최대한의 이성으로써 천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들로서는 그리스철학으로써 
그것을 밝히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대체적으로 플라톤적 철학이 특히 
애호되었으며, 그 밖에는 스토아철학이 일부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물론 
훗날에는 신(新)플라톤철학이 큰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그리스철학으로 
그리스도교적 진리를 이해하려고 한 데서 교부철학이 성립된 것이었다. 이 
경우, 그들로서는 진리는 예수라는 그리스도〔救世主〕에 의해 완전히 
계시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구약(舊約)의 진리는 단순히 그리스도교적 
진리의 전조(前兆)이며 선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철학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적 진리의 선구일 뿐이었다. 지혜에서 비롯된 사랑의 철학은 
그리스도교에서 비로소 충분한 의미를 가졌고, 따라서 그리스도교만이 단 
하나의 참된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훗날 스콜라철학의 
경우와는 달리, 신앙과 이성의 관계 또는 신학과 철학의 관계 등은 정면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시각이 단순한 이치에 
불과했으나, 초자연적인 진리의 이해는 결국 인간적 이성의 권회(勸誨)에 
존재하므로 그들은 이 진리를 지향하며 많은 노력을 기

울였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이해의 가능성을 모색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러 신앙의 지도자들은 본래 교부라는 존칭을 받고 있었다. 훗날의 교부란 
주교 또는 그 밖의 성직자·평신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거의 모든 
경우에 전통에 따라서 저술하고, 또 교회에서 승인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교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범위는 반드시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리스어로 저작한 교부들은 그리스교부, 라틴어로 저작한 교부들은 라틴교부라 
부른다.

〔그리스교부〕 호교가(護敎家)로는 우선 유스티노스를 들 수 있다. 황제에게 
호교서를 올리고, 자서전적인 저술도 남기고 있다. 다음에 그노시스의 
이단(異端)에 대하여 전통을 지킨 이레네우스가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그 제자 오리게네스도 중요하다. 오리게네스는 매우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처음으로 체계적인 신학을 수립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이단 
사설(邪說)이 내포되어 있었으므로, 오랫동안 논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사도신경(使徒信經)이 확립되는 동시에 사변의 길이 
몹시 좁혀졌으나 차단된 것은 아니었다. 4세기에는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와 
바실루스 등의 신학자들이 사색하였다. 4세기가 끝날 무렵과 5세기 초에 기묘한 
책자가 나타났는데, 사도 바울의 제자 A.디오니시우스가 썼다고 전해지는 이 
책자는, 중세에서의 신플라톤적 신비주의의 원천으로서 매우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저자 미상의 위서(僞書)로서, 오늘날에는 《디오니시우스의 
위서》라고 불리고 있다. C.막시무스·D.요하네스 등이 최후의 
그리스교부들이다. 요하네스의 사상은 그리스교회에서는 오늘날에도 권위를 
지니고 존중받고 있다.

〔라틴교부〕 그들은 신플라톤철학의 세례를 받을 때까지는 큰 사상을 산출할 
수 없었다. 먼저 호교가 데르툴리아누스는 법학적인 논증으로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변호했으나, 만년에 이단으로 기울었다. 아르노비우스·라크탄티우스 
등이 다음에 나타났다. 암브로시우스는 뛰어난 교회정치가, 히에로니무스는 
성서의 라틴어역자(불가타)로 알려져 있고, 수도생활을 권장한 인물이기도 
했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최대의 교부이다. 후세에서 단순히 
교부라고 부를 때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가리키게 마련이다. 처음에 키케로의 
가르침을 받아 진리의 길에 들어섰으나, 곧 회의론에 빠져들었다. 이 회의론은 
문인인 키케로로서는 행복의 길이었으나 급진적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비참의 
경지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신플라톤철학과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로 사랑의 
세계에 눈을 뜨고 드디어 386년에 회심(回心)하여 391년에 히포의 사제가 되고, 
396년에 그 고장의 주교가 되어 일생을 교회를 위해 바쳤다. 그동안 그가 
저술한 엄청난 저서 《고백록》 《신국론(神國論)》 《삼위일체에 관하여》 
등은 그리스도교적 사상의 보고이다. 그리스도교적 철학은 그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그의 역사철학은 근세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보에티우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그 주석도 출간했다. 정치적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으나, 
얼마 안 있어, 그것이 순교였음을 사람들이 믿게 되어 존경받았다. 12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스콜라철학자들에게 철학의 권위자였다. 최후의 저명한 
라틴교부로는 카시오돌스 또는 세비야의 대주교 이시도루스를 꼽는다.박재훈

<중세철학 개관>

   1. 중세란 고대와 근대의 중간시대로서 대체로 5세기부터 14세기까지를 
말한다
      즉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9년 까지의 
      1000년 정도를 가리킨다

   2. 중세철학의 구분을 두 시기로 대별하면 
      제 1기는 사도의 전통과 당시의 철학사상에 의해 기독교 신학이 교의로서 
확립된 교부철학의 시대
      즉 기원후 1,2세기의 교부에서 시작되어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정점으로 해서 9세기까지 미친다

      제 2기는  이 교의를 설명하고 논증하여 기독교 신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적인 이론체계로 정리하고 
      현세적인 지식도 포함한 철학으로 이를 보충한 스콜라 철학의 시대는 
9세기에 들어와 
      교부 철학의 계승으로서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제 1개화기는 11세기로서 교회와 그 아래에 있는 철학을 보편적인 
학문 체계로 완성하려고 했다
      제 2융성기는 13세기로 이 시기는 고전적 스콜라파라고도 한다
      13~14세기는 그 절정기이면서 동시에 쇠퇴기였으며 
      15세기는 기독교 철학 일반의 퇴조기 근세철학을 향한 과도기였다
      참고로 이상의 기독교 철학 외에도 11~12세기 때 아라비아 회교철학과 
유대교 철학이 중세철학에 포함된다
      플라톤 이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서구의 기독교 철학에 
도입하고 사상적 충실화에 공헌했던 것도 
      이들 동방의 철학사상이었다.

      흔히 중세기를 두 기간으로 나누어 전자를 교부철학 후자를 
스콜라철학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것은 기독교계의 지도자인 교부들이 기독교의 사상적 확립을 이룩한 
기간과 
      완전히 교권이 확립된 뒤에 교육기관을 갖춘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뚜렷해진 기간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교부철학>

   1. 기독교회의 초기의 저술가는 교부(Patres ecclesiae ; church 
father)라고 불리었으며
      그 철학은 교부철학(Patristic Philosophy)이라고 한다
      초기의 교부는 한편으로는 이교도 철학과 로마 황제로부터의 외적 공격에 
맞서 투쟁해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위 그노시스주의(Gnosticigm)에 맞서 싸워야 했다
      참고로 전자의 경우에 그 교부는 호교파(Apologists)라고 일컬어졌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반그노시스파(Anti-Gnostics)라고 일컬어졌다

   2. 호교파는 2세기에 로마황제에 대해 기독교의 진리성과 도덕성을 옹호한 
사람들인데
      그 선구자는 유스티누스(100-166년 무렵)였다

      유스티누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과 철학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오직 하나의 예지 
      즉 하나의 철학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플라톤 주의는 이를 위한 하나의 준비였던 것이다

   3. 그 후 타티아누스와 아테나고라스 등이 활약했지만 
      보다 유명하고 영향력도 컸던 사람은 테르툴리아누스(160-222년 
무렵)였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사상은 신은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할 대상이며
      기독교도의 신조는 진리 문제 이전의 지상 명령이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믿는다."라는 그의 말은 아직도 
유명하다
      이말은 그리스 철학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4. 그노시스파란 2세기에 유행했던 신학으로 성서적 그리스도교적인 요소와 
그리스적 
      동방적인 요소의 기이한 융합으로 그노시스(지식: gnosis)를 신앙보다 
귀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세계를 어둠과 밝음의 투쟁으로 보는 마니교 
      인간 최고의 경지(그노시스)를 신과의 합일로 보는 플로티노스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5. 이렇게 그노시스파는 정통파로부터는 이단시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노시스파를 단순히 배척만 하지는 않고 그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정통적인 교회신앙의 입장에서 교리를 정비하려고 하는 시도가 3세기 
초에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150-216년 무렵)와 그의 제자인 오리게네스 
(185-254)가 지도한 
      알렉산드리아 종교학교 또는 문답학교(Catechetical School)가 바로 
그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파의 사상에서 클레멘스는 플라톤을 
그리스어로 저술하고 있는 
      모세라고 말했으며 이 학파는 플라톤이 밝히고 있는 진리를 구약성서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6. 이와 같은 교의 (문답학파)도 역시 헬레니즘적 경향이 강해서 
이단시되었으며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 후 그를 따르는 지지자(바실리우스와 그레고리우스 등등)에 
의해 그의 사상은 지속되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교리에 대한 정통파와 이단의 구분에 관한 논쟁은 끊이지 
않았으므로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의 니케아에서의 제 1총회(Council of 
Nicaea)와 그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 2총회 등을 통해 교리를 재정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부철학의 완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초기 교부철학 요약>

   그리스 교부들은 철학과 신학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참다운 예지 또는 철학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을 그리스도교에 대한 예비 교육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 철학을 다룸에 있어서 그들의 주요한 관심사는 그 철학이 
   그리스도교적인 진리를 예상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은 그들에게 명백했던
   진리로부터 일탈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전자가 자주 구약성서에서 빌려온 데 있다고 보았고 
   후자는 인간적인 사색의 약점과 그리고 독창성을 추구하는 
   철학자 자신들의 부당한 욕망과 허영심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사상을 채용했을 때 그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그것을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의 철학체계로 통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예지를 설명하고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고 - <중세철학사 / F.코플스톤 / 서광사>
          <세계 철학대사전 / 고려 출판사> 
          <서양 철학사 / 玉井茂 (日本) / 김승균, 김승국 : 옮김 / 일월서각>  
                         
아라비아철학 [ Arabic philosophy ]  인쇄용 화면 
 
 분류  
 
· 철학 > 동양철학 > 기타 동양철학

  
 
 요약  
 
아랍어를 공통어로 사용하는 이슬람교 문화내에서 발전된 철학.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아라비아 철학은 반드시 아라비아인의 철학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종면에서 볼 때 아라비아인 철학자는 유명한 킨디 정도이다. 그 외는 모두 
이란인 ·터키인 ·유대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슬람교의 통일하에 아랍어라는 
공통어를 사용하고 풍속 ·습관이 같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인종의 공감이 
형성되어 아라비아 철학이라는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이 형성되었다. 아라비아 
철학은 주로 7세기 후반부터 13세기에 걸쳐서 한편으로 그리스의 철학사상을 
받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교의 테제와 조화시키면서 발달한 독특한 
철학이다. 철학을 아랍어로 팔사파(falsafa)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된 외래학문임을 나타낸다.

이 아라비아 철학은 12세기 이래 유럽에 계승되어 스콜라 철학을 비롯, 여러 
유럽 사상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기원은 
5~7세기에 걸쳐 비잔틴의 동방정교회에서 쫓겨난 네스토리우스파(派)와 
단성론자(單性論者) 등 이단 그리스도교도들이 그리스 사상을 시리아 지방으로 
전파한 데서 시작된다. 여기서 니시비스, 에데사, 준디 셔프르를 중심으로 
수많은 철학서,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저작과 폴퓨리오스나 
알렉산드로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 등이 시리아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7세기 전반, 이슬람이 시리아 지방을 정복하기 이전에 이미 서(西)아시아는 
헬레니즘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시리아 헬레니즘이 바로 다른 아라비아어 
문화와 마찬가지로 뒤에 아라비아 철학을 꽃피게 한 토양을 마련한 것이다.

632년 마호메트가 죽고 정통(正統) 칼리프 4대의 시대가 이어지는데, 661년에 
제4대 칼리프인 아리 일족을 멸망시킨 시리아 총독 무아위아가 
우마이야왕조(王朝)를 세우기에 이르자 드디어 그리스 사상, 특히 
J.다마스케누스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영향을 받아 신학적 기초가 전혀 없던 
이슬람교가 그 철학적 기초를 문제삼게 되었다. 이 때 그리스적 합리주의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무타질라(Mu’tazila)파가 등장하여 
《코란:Koran》이 신과 동등하게 영원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여 신(神)의 섭리의 
절대성에 반대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여 스스로 ‘통일과 정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통일이란 신의 유일성(따라서 코란의 종속성)을 주장하는 
것이며, 정의란 인간의 책임의 근거로서 의지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와실 이븐 아타 등으로 시작되는 무타질라파에서의 그리스 사상과의 
접촉은 일반적인 시리아 헬레니즘을 배경으로 한 역시 간접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750년에 아바스왕조(王朝)가 성립된 이후부터 그리스 원전(原典)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아라비아 사상은 다음 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 첫째는 이른바 ‘철학자(哲學者:failasf)’의 계보로 그리스 철학서를 직접 
연구하는 새로운 유형의 학자를 의미한다. 킨디,알파라비, 이븐 시나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정통신학(正統神學:kalm)’의 계보로 아쉬아리, 
가잘리 등의 흐름이 그것이다. 셋째는 아라비아의 신비주의 수피즘(fya)으로 
잘라루딘 루미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좁은 뜻에서의 ‘아라비아 철학’을 대표하는 것은 ‘철학자’ 
계보이다. 이 계보에서는 한결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플라톤적인 
입장에서 파악하고 발전시켰다. 그 원인은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 플로티노스의 
저작 《엔네아데스 Enneades》의 일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으로 
오전되기도 하고 프로클로스의 《신학원리(神學原理)》 요약(要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론(原因論)》이 된 사실에도 있지만 아무튼 거기에 
하나의 독특한 철학적 조류가 생겼다. 둘째의 ‘정통신학’은 이와 같은 
그리스적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철학자’들을 이단(異端)이라 하여 
배척하고 《코란》을 자의(字義)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종래의 
신학자와 같이 침묵하지 않고 스스로 철학적 개념이나 방법을 사용하여 
‘철학자’와 논쟁하기를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하는 
사람(mutakallim)’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쉬아리는 신의 절대성을 특이한 원자론으로 옹호하고, 가잘리는 기적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데 대한 오류를 증명하려고 하여 자연적 원인의 개념을 
분석하지만 그것은 D.흄의 인과율(因果律)을 생각하게 한다. 셋째의 수피즘은 
일면으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철학자’들처럼 오로지 이성적 
토론으로 기울지 않고 오히려 금욕적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자기의 신앙을 
깊이하려 하고 다른 일면으로는 외적인 행위의 덕(德)을 중시하는 
‘정통신학’에 대하여 오히려 내적인 종교적 경건을 주시한다. 가잘리는 어떤 
의미에서 ‘정통신학’과 수피즘의 접점(接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잘리의 신랄한 ‘철학자’ 비판에 의하여 동방에서는 ‘철학자’의 전통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이 계통은 에스파냐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유지, 
발전되었다. 

그것은 이븐 바자, 이븐 투파일을 거쳐 이븐 루슈드에서 정점에 도달하는데 
그는 가잘리의 《철학의 파괴》에 대하여 《파괴의 파괴》라는 저작으로 
응답하고, 역사상 가장 정밀한 아리스토텔레스 주석(註釋)을 완성하여 아라비아 
철학의 합리주의를 마지막으로 빛냈다. 이와 같은 아라비아 철학자의 지적 
노력은 12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적극적으로 흡수 ·소화되어 서유럽의 진정한 
출발점인 이른바 ‘12세기 르네상스’를 탄생시키게 된다. 종래에는 아라비아의 
철학이나 사상을 서유럽이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관점에서만 보는 경향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오히려 서유럽 사상이 아라비아에 어떻게 의존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많은 것을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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