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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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2월 11일 화요일 오후 12시 01분 46초
제 목(Title): 조연현/ 종교기자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출처: 한겨레 

너무 오랫동안 글을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책을 펴낸 뒤, 일할랴, 또 여기저기 불러 다니느랴-이 핑계, 저 핑계로 
소홀했습니다. 우선 제가 한 잡지에 쓴 글을 올립니다. 가톨릭 
베데딕도수도회에서 만드는 <들숨날숨>이란 월간 영성잡지 12월호 `종교마당'에 
실은 글입니다.



종교담당기자를 하며 가는 곳마다 듣는 질문이 "당신의 종교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보면 나오지만 전 어려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지금은 어느 
종교에 가든지, 그 종교를 존중하고, 그 종교의 예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종교냐고 물으면 그저 웃을 뿐입니다.
 


1977년 가을이었다. 시골 중학교 2학년 소년이던 내게 닥친 불행은 종교는 물론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가슴에 안게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아침에 사랑채 마루를 오르려다가 오르지 
못한 아버지를 가족들이 안채 마루로 옮겨 "왜 그러느냐?"고 걱정스레 묻자 
아버지는 "괜찮아"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도 그것이 최후의 말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제의 징병을 피해다니면서 탄광에서 일하다 수은중독에 걸려 평생 
고생을 했지만, 58살로서 생을 마감하리라곤 상상치 못했다. 

아버지는 숟가락 하나 없이 시작한 살림을 중농이상으로 키우고, 7남매를 
키워온 가장이었다. 위로 딸만을 연달아 넷을 둔 끝에 아버지가 무려 45살에 
얻은 아들이 나였다. 난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쓰러지는 그날까지 사랑채에서 
아버지와 함께 한 방을 썼다.

어렵게 얻은 아들이니 그 애틋함이야 어찌 다 할 수 있었을까만 아버지는 
겉으로 사랑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느낌으로 아버지의 자애로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늘 친척이나 이웃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면 이를 외면하지 못해 
어머니는 "둘이서 뼈골이 빠지며 일한 쌀가마를 남의 빚보증으로 몽땅 내준 게 
벌써 몇 번째냐"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

이웃집과의 관계에서도 양보하는 쪽은 늘 아버지여서 어린 내 눈에도 아버지가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손해봐야 편한 법"이라며 
너털웃음을 짓곤 했다.

아버지에겐 친구와 술이 늘 함께 했다. 엄격한 아버지에게 나는 애정을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술 한잔하고 뒷짐을 진 채 멀리서 오는 아버지를 뵐 
때까지 가슴이 설렐 정도로 아버지는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연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의 죽음과 방황


아버지는 택시에 실려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결혼해 도회지에서 살던 큰누나와 
결혼을 준비하며 집에 있던 둘째 누나가 병원을 지키는 대신 어머니는 한창 
추수철인 집을 비우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들에서 일을 했다. 

다음날 둘째 누나가 시골집에 내려와 "아버지는 산소호흡기를 꼽고 있지만, 
회생이 어렵다고 한다"며 울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 하늘이 흔들리는 듯했다. 
시신을 안방에 모시기 위해 어머니와 누나들은 통곡을 하면서 안방의 세간들을 
빼내 작은 방으로 옮겼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절실한 기도를 시작했다. 아버지와 지내던 사랑방에 숨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난 그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만 철썩같이 믿었다. 간절히 구하면 
하느님께선 반드시 이를 들어준다는 말을 주일학교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에, 드디어 하느님께서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줄 바로 그때가 왔다고 
매달렸다. 

"기도를 들어주시면,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라도 달게 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그땐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마치 눈앞에 계시듯이 어린아이처럼 매달려 
울며 기도했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오직 기도뿐이었다. 일심으로 기도하면 절대 
하느님께서 이를 저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의심할 바 없는 믿음이었다. 

어머니는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앞 산 절에 지성으로 불공을 
들여 나를 얻었다고 했지만, 나는 교회장로인 마을 유치원원장이 이끌었던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혼자서 집에서 10리도 더 
떨어진 교회를 착실히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병원에선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집으로 모셔가라고 했다. 병원서부터 초상집분위기였다.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마치 가족마냥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고운 네 누나들이 
그토록 애처롭게 우니 의사들도 눈물을 참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사흘째 밤 구급차로 집에 실려왔다.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실려오자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 수백 명이 안방을 둘러싸고 마당과 뒷밭에 가득 
들어선 채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눈을 뜬 채 숨을 몰아쉬며 의식없이 허공만 응시했다. 산소호흡기를 
떼면 바로 숨을 거둘 것이라던 아버지는 집에서 날이 새도록 그렇게 숨만 
몰아쉬고 있어 숨이 쉽게 끊어질 듯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목에 가래까지 차올라 거침 숨을 몰아쉬고 있어 가족들은 더욱 
애간장이 녹았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젠 살아나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어서 숨을 거두기를 바랐다.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의 머리맡에 다가앉으며, "어린 아들들을 못잊어 눈을 
못감느냐"며 "연현이나 선현이는 내가 미국 유학까지 보내 공부 잘 시킬테니까 
걱정말고 눈을 감으라"고 애원했다. 아버지는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을 주루루 흘리시더니 드디어 눈을 감았다.

난 너무나 애통해 울부짖으며 하느님, 예수님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들어주긴 뭘들어줘. 그리고 있긴 어디가 있어. 있다면 왜 우리 아버지처럼 
착한 사람을 이렇게 고생만 시키고, 죽게 해."

마을 전체가 초상이 난 것마냥 마을사람들 수백 명이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마을 어른들은 "너희 아버지는 너무 착한 분이라서 하늘에서 쓰기 위해 데려간 
것"이라고 말했지만, 내 화는 풀리지 않았다.


계속되는 시련


장례 뒤 1년상을 위한 영정이 사랑채에 차려졌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저주하며 그 위로 교회에도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기도에 응답한다던 교회에선 절망에 빠진 어린 소년에게 
아무런 답도, 희망도 주지 못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년 뒤엔 사랑채에 큰 화재가 나서 사랑채에 붙어있는 
외양간의 소의 고삐줄을 풀어주려던 어머니가 놀란 소에 의해 쓰러져 온 몸에 
화상을 입게 됐다.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간 뒤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예쁜 녀석들이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는구나"라고 혀를 차는 모습을 들을 땐 "너무도 착한 어머니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느냐"며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 더욱 분노했다.

어머니는 오랜 고통 끝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제 삶의 모든 비난은 
하느님 몫이 되었다. 마치 생기다 만 것처럼 병약한 몸에 대해서도 도무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다며 늘 원망했다. 

집을 떠나 도회지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이미 예전의 착한 
모범생이 아니었다. 공부와 세상에 흥미를 잃고 신과 삶을 회의했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때 자퇴를 했고,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의 
막노동과 고향으로 돌아온 뒤 농사, 그리고 자살….

고통 에 친구들보다 3년 늦게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했을 때까지 마음의 
상태는 지옥과도 같았다. 대학 때 극성스런 몇 사람의 전도로 인해 다시 교회를 
나가게 같았지만, 교회문을 나서면 다시 허전해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죽음과 삶에 대해 전혀 의문을 풀어주거나 아픈 가슴을 끌어안아 주지도 못한 
채 "믿음이 부족하다"고 채찍하는 것은 과거의 생채기를 덧나게 하는 원인이 
되곤 했다.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천국과 지옥


늘 누구도 풀어주지 못한 의문은 내면의 갈등을 부채질하곤 했다. 그때까지도 
처음 주일학교에 갔을 때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칼을 들어 
외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장면을 보고, 너무나 놀랐던 기억은 '사랑의 
하느님'보다는 '무서운 하느님'을 떠올리게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후 그렇게 하느님을 저주하면서도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면 마음 한켠에선 하느님의 복수를 받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주일학교부터 계속된 신앙교육은 늘 내 가슴을 따뜻하게 하거나 해방을 맛보게 
하기보다는 이처럼 더욱 더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두렵게 했다.

난 그 뒤로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수많은 내면의 갈등과 방황을 거쳤다. 
그러다 우연히 나의 마음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모든 삶의 불행이 
하느님 탓이나 상황의 탓이 아니라 바로 내 탓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모든 
문제의 뿌리가 자신에게 있으며, 그 해답 또한 자신에게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상황일지라고 그 순간 어떤 감정, 어떤 마음상태를 갖느냐 하는 것은 
결단코 나의 자세에 달린 것이었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권능 있음을 
알려주려 왔노라"라고 한 말을 자각한 것도 이때였다.

마음먹기에 따라 같은 세상을 천국으로 느낄 수도, 지옥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 지옥을 창조해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14살 어린 영혼을 책망하지는 않았다. 그런 영혼마저 가슴속으로 깊게 
끌어안고 용서하고 사랑했다. 그랬을 때 교회의 목사도, 가족도 구원하지 
못했던 그 영혼은 가슴속에 수십 년 먹은 아픔과 두려움을 토해내며 울었다. 
그리고 상처투성이였던 어린 영혼이 그 나이 그 또래 소년의 해맑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공감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삭을 제물을 바치라고 한 것은 정말 이삭을 잡으려 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아집에서 벗어나 '하느님 마음'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고 느끼게 됐다.

모든 고통의 뿌리인 집착 가운데서도 가족에 대한 집착, 더구나 외아들에 대한 
집착만큼 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예화가 자신에 대한 집착, 가족에 대한 집착, 돈에 대한 집착, 권력에 대한 
집착, 성장에 대한 집착에 메어있는 이들에게 아브라함을 통해 아집을 멸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받아들여야할 신비


얼만 전 요즘 가장 급성장하고 있는 교회의 여신도 한 명이 '하나님과 목사님의 
능력을 보여주겠다'며 제초제를 먹고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빨리 목사님에게 데려가면 살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누구나 병들 수 있고, 예외없이 한번은 죽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은사'와 
간증을 외치는 자들의 뒤에서 자신은 하느님으로 부터 버림받은 것이라며, 
누구에게 말도 못한 채 절망하고 더욱 비통해지는 병자와 장애인들이 한 
둘만일까.

지금도 세상의 이치와 현실에 깨어있게 하기보다는 환상과 허상으로 이끄는 
모습이 비단 그 교회, 그 종교만일까. 아무런 깨달음도 없이 남의 얘기를 
앵무새처럼 전할 때, 또는 자신이나 자기 교회의 힘을 과시하려는 탐욕에 눈이 
멀 때 사람들은 평화로 인도되기는커녕 이렇게 고통 속으로 인도된다.

나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이처럼 사람도 흘러간다는 것, 그리고 이 강물이 
바닷물이 되고, 다시 구름이 되고, 빗물이 되고, 채소가 되고, 내가 되는 
것처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과 현실에서 부딪치는 모든 상황들이 저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신비'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런 자각에도 불구하고, 가령 
지금 내 자신이나 어머니, 아내, 형제 등의 죽음이 닥쳐온다면 얼마나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는 14년동안이나 나와 함께 해 주고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모든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죽음이 가져다주는 슬픔 속에서도 따뜻해지는 것이 있다.

이제 나의 지난 고통조차 내겐 이미 은혜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모든 사람과그리고 내 삶과 14살 어린 영혼까지도 고맙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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