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rhew) <dsl-206-189.resn> 날 짜 (Date): 2001년 11월 27일 화요일 오후 05시 48분 51초 제 목(Title): 데리다의 해체론과 성경의 이해 위에서 어떤 분의 창세기의 내용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상당히 긴 쓰레드가 달리고 결국의 논점은 성경은 진리다 아니다 하는 곳으로 흘러 갔더군요. 성경이 진리다 아니다 이전에, 절대 보편 타당한 진리가 있는가? 있다면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이 더욱 핵심적이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위치 혹은 가치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 이 글을 올립니다. 줄여서 쓴다고 했는데도 긴 글이 됐습니다. 안 믿는 분들에게 믿으라고 설득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고, 성경이 그냥 맹목적으로 믿고 편리한대로 갖다쓰는 글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이해에 도움을 원하시는 분들은 건국대 물학과 교수인 쥬영흠 박사가 쓴 “창세기의 천지창조” (성경읽기사 ) 참조하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분은 유태인이라 히브리어 원문으로 성경을 읽고 전공인 물리학으로 창세기를 해석하였습니다. (참고로, 쥬 교수는 그냥 평범한 물리학자가 아니라 미국 물리학회(APS) 평생 회원인 탁월한 학자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가장 최근에 등장한 문학비평이론인 해체론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해체론은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가 완성한 문학 비평론으로 문학 작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다룬 이론입니다. 그의 논지는 스위스의 언어 심리학자인 소쉬르의 발견에서 시작됩니다. 제가 한글로 뜻을 정확히 전달할 자신이 없어서 영어로 된 요약을 올립니다 (Dictionary of Philosophy and Religion by William L. Reese, pp. 165~167). (1) Citing (in his essay on “Differance,” 1968) de Saussure’s discovery that speech is a system of differences between signs, Derrida invented the term differance to stand for the double fact that for signs to functions they must “differ” from each other; and, since there is no way of brining any chain of signification to an end, signs must “defer” to one another endlessly. This is the free play of signifiers, which he addressed, first of all, in relation to three major philosophers. 간단히 말해, 데리다는 언어를 불완전한 뜻을 갖는 단어들의 끝없는 연결로 봤습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이렇게 되면 언어의 이해는 이해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 되지요 (따라서 진리는 상대적). 그러면, 데리다는 “절대 보편 타당한 진리가 있고 인간은 이를 알 수 있다고” 한 그리스 형이상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다음을 보세요. (2) From Plato, and Greek metaphysics generally, he developed the idea of “presence.” Plato preferred speech to writing because of the presence in the dialog of speakers to each other. For Plato inner speech is pure self-immediacy, a dialogue of the soul with itself; the dialogue of two different speakers has shared immediacy. Whether one is present to oneself or to another, both types of dialogue feature speech (phone); they are “phonocentric”. 플라톤과 그리스 형이상학자들은 임재 (presence) 라는 개념으로 언어 전달 이면에 내재하는 영적인 communication이 데리다가 말한 언어의 한계를 넘어 speaker간에 정확한 의미 전달을 한다고 주장했고 데리다는 이를 phonocentric이라 불렀습니다. (3) When speech is written down, the speaker is normally absent, and the interpretation is controlled by the reader; Socrates/Plato pointed out that what is written down can be maltreated and abused. Derrida found a bias toward the spoken word in Greek metaphysics and in Western culture, generally. In fact, however, he also argued that Western thought assumes self-presence in both spoken and written discourse. Consider, in Greek metaphysics, the timeless present, the immortal soul, eternal forms, the primacy of Being, and the eternal God. Such concepts, presuming presence, are viewed by Derrida as “logocentric” (from logos, “word, speech, reason”, also “the word of God”). Logocentrism supposes that truth and reality can be made present to one, and tries to insure this by following a logic of identity, non-contradiction, and excluded middle. But in all these cases, in written, as well as spoken discourses, absence has clearly intruded. All such logocentrisms deconstruct before the differential play of signifiers, i.e., before differance. 데리다는 그리스 철학은 물론 서양철학에 절대 보편 타당한 진리에 대한 bias를 발견하고 분명한 absence가 있으므로 그러한 bias 즉 logocentrism들이differance 앞에서 해체(deconstruct)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그리스 철학에서 말한절대 보편 타당한 진리의 임재가 (presence)가 없으므로 진리(truth)가 현실(reality)과 일치한다고 (can be made present to one) 하는 생각이 해체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이 보편적 사실이라고 하는 생각이 해체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Logocentrism이 사용하는 도구를 주목해 보세요- a logic of identity , non-contradiction, and excluded middle. 즉 모든 두부 자르듯 분명히 나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선과 악, 존재와 비존재, 사실과 허위, 진리와 비진리 등등 그 러나 데리다는 이런 이분법적 개 념들이 언어 불완전성 앞에서 의미를 상실한다고 말합니다. 한때 유행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가 바로 이와 일맥상통하죠. 패션에서는 속옷과 겉옷의 경계가 없어지고, 남녀의 성구별이 흐려지고, 선과 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등등. 이 다음부터는 원문에서 중요한 부분만 소개합니다. 궁금하신 분은 위에서 밝힌 문헌을 참조하세요. (4) …중략… Derrida argued that absence is equally present in expressions and in indications. When Husserl finally granted that the quest for timeless essence was a failure, he would seem to have agreed. (5) The mixture of presence and absence runs throughout philosophy, appearing in the oppositions of identity/difference, being/nothing, same/other, truth/falsity, even life/death. In every case, however, differance maintains our relationship with what is absent through “the play of trace” in what we necessarily misconstrue. The free play of signifiers allows us this. 즉 인간은 항상 위에 언급한 분명한 듯 보이는 반의어들 사이에도 반드시 혼란을 일으키는데 (absence로 인해) 이런 혼란에서 그 빠진 것에 대한 관계를differance를 통해 추적할 수 있답니다. Differance는 관계를 추적할 뿐이지, 오해가 끼어든 이해에서 어떤 것이 맞고 틀리다 말해주지 않습니다. (6) Derrida approves of the manner in which Heidegger treats this problem. …중략… Behind the cancelled sign Heidegger found a hidden play of metaphors. (7) The conclusion of these points is Derrida’s view that all words are inaccurate and need to be cancelled out. …중략… Because everything is under erasure a new kind of linguistics is called for, which Derrida named “Grammatology.” The point of Grammatology is to encourage the deconstruction of texts. It is accompanied by a logic of non-identity; rather than either-or of the principle of excluded middle, the operative principle is neither-nor (or both-and). 한마디로 모든 단어는 최종적 의미를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같은 단어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서로 상충되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이러한 상충은 neither-nor의 논리에서 무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text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8)~(11)은 생략합니다. 요약하자면, 데리다는 인간의 언어는 불완전하고 따라서 대화를 하거나 글을 읽을 때 반드시 speaker나 author의 의도와는 다른 의미로 speech나 text가 이해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무엇이 맞는가 틀리는가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언어에 기반을 둔 인간의 논리로 이분법적 구별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죠. 데리다는 이를 문학 작품의 해석에 적용해서 문학 작품의 이해는 독자에 따라 달라지고 어떤 해석이 맞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저 text는 text일 뿐이란 말이죠. 그러나 이런 그의 논리는 단순히 문학 비평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인식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닌 철학의 오랜 논쟁거리인 절대론적 진리관과 상대론적 진리관 혹은 Socrates/Plato와 Sophist들 사이의 해결되지 않는 숙제지요. 절대론적 진리관은 바로 기독교의 진리관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교부들이 그리스 철학으로 신학의 틀을 잡으려 했습니다. 진리를 바라보는 입장이 기가막힐 정도로 같기 때문이죠. 그리스 철학자들이 진리의 임재(presence)를 말했듯이, 성경에서도 성령의 임재가 없이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전 2:10~13, 고후 3:14~18, etc.). 그러면 문제는 다시 인간에게 진리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완전한 presence가 있냐 없냐의 문제로 돌아가게 됩니다. 데리다는 Husserl과 Heidegger를 인용해 없다고 주장했지요. 이것이 해체론의 두번째 전제입니다. 그러면 해체론의 첫번째 전제인 인간의 언어가 불완전 하다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원문에서는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이는 Kant가 말한대로 인과율의 법칙을 따르는 인간 인식의 한계에서 나옵니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감지함으로써만 인간은 무엇을 인식하게 되고 인식된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단어들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지요. 영구히 시간을 두고 살펴봐도 사물 자체는 인간에게 인식된 대상과는 일치할 수 없으니까요. 양자론의 파동-입자 이중성을 생각해보면 쉬운 예가 될까요? 전자는 우리가 인식하고자 하는 대로 입자로 인식하고자 하면 입자로 관측되고 파동으로 관측하고자 하면 파동으로 관측도죠. 그래서 전자는 입자다 파동이다 딱 구분 (EITHER a particle OR a wave)할 수 없고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다 (BOTH a wave AND a particle)혹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NEITHER a wave NOR a particle)라고 말할 수 있지요. 양자론의 근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지만 저는 Kant의 “인과율에 법칙을 따르는 인간의 인식”이 그 근원이라 생각합니다. 인과율의 법칙을 고려하면, 인간의 인식은 반드시 signal의 전달을 동반하게 되고 (wave 현상) 이것이 우리가 전자를 인식하는 과정에 끼어들어 불확정성을 유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파동이다 입자다 하는 불완전한 단어로는 전자 그 자체를 완전히 기술할 수 없죠. 결국 전자의 실재 (reality)는 우리의 인식을 초월합니다. 이렇게 자연을 구성하는 존재조차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여 존재하는데 단순히 논리나 직관으로만 따져서 Logos, 진리, 혹은 신의 presence가 있다 없다하는 것이 실재(reality)와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인간이 알 수 있을까요. 즉 데리다의 첫번째 전제의 근원을 생각해 보면 두번째 전제를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모두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해 인간이 성경을 통해 절대 보편 타당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믿으면” 알 수 있는 것이고 “안 믿으면” 성경은 단순한 text에 불과하고 읽는 사람에 따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또는 단순한 설화가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실재(reality)는 증명에 기인한다기 보다 믿음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히 11장). 기독교 신앙은 성경이 절대 보편 타당한 진리로 성령의 임재하에 인간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물론 성령의 임재하에서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현세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부분적으로 이해하지요 (고전 13:9~12). 그리고 바른 신앙은 그 부분적 이해를 완전한 이해로 확대하기위해 부단히 말씀을 묵상합니다 . 여러 분들이 지적한대로, 맹목적 문자적 이해로 편리한대로 갖다 붙이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있고 없는 말씀이 있는데 (히 5:12~14)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스스로의 힘으로 억지로 풀려다 잘못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벧후 3:16). 성경의 이해는 독자 스스로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성령) 의 임재로 되기에 딤후 4:14~17절에 사도 바울은 성경을 스스로 행동하는 인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좀더 부연 설명하자면, 성경은 진리에 관한 interpretation이 아니라 revelation (진리의 임재하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드러난 진리, 진리 그 자체는 하나님) 입니다. 마치 양자론이나 상대론 (자연의 interpretation)이 나오기 이전에도 자연은 항상 그 법칙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revelation) 에 따라 움직여 왔듯이 성경도 인간의 interpretation이 아닌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revelation으로 만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말하면, 자연을 일반 계시라고 하고 성경을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이러한 계시의 목적은 신명기 29:29 및 성경의 다른 여러 구절에 나와 있고 계시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성경을 읽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