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pringle (주애리) 날 짜 (Date): 2001년 10월 29일 월요일 오후 03시 45분 28초 제 목(Title):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PD수첩 취재에서.. 지난 23일 피디수첩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병역 문제가 방영되었다. 전체적인 내용에 정말 공감하면서 방송을 지켜보았다. 인터뷰중에 개신교 지도자라는 사람 두명이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 거부에 대해 말하는 걸 들으며 저런 인간들이 무슨 지도자며 무슨 종교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면? 하는 질문에 대답이라는 것이 "그냥 두면 되지요.. 지금까지 그래왔는데 새삼스레 멀 또 논의화 합니까.." 웃기지도 않는 사람들.... 난 개신교인도 카톨릭교인도 여호와의 증인도 아닌 무교인이다.. 하지만 난 이 방송을 보면서 왜 사람들이 카톨릭에는 호의적이나 개신교인들에 대해서는 질려하는지 알수 있을것 같았다.. 아래는 PD수첩 홈페이지에 실린 한 카톨릭 교수의 잡지 기고문이다.. ************************************************* 이 시대의 징 표 경향잡지(가톨릭 잡지) 2001년 5월호 다수가 지켜주어야 할 소수의 인권? 이 재 승 「경 향잡지」독자들은 대다수 성실하고 공정한 가톨릭 신자라 생각한다. 그리고 필자는 법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보루가 되도록 더욱 정의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인권 문제에 대해서 말하자면 구호도 단순하고 치열하던 80년대의 독 재시대보다 요즘에는 그야말로 다양하고 속깊은 대목이 있다. 작년에 있었던 김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소식도 이 나라를 모범적 인 인권국가로 격상시킬 의무를 우리 모두에게 크게 일깨웠다고 생 각한다. 그러나 인권의 갈급한 요구들은 폭발하지만 인권은 여전히 만발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 까닭을 여기에서 장황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대신에 오래도록 짓눌려 왔던 소수자 집단의 인권문제를 거론하고 싶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 관점에서만 사물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공정하고 당연한 견해로 확립시킨다. 그러한 견해를 서로 나누면서 여론이라는 외투를 입히고 이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부드럽게 마지막에는 세차게 강요한다. 그 자리에는 언제나 법이 서있다. 화합, 토론 그리고 마지막엔 강요의 순서이다. 이 과정을 통해 사회에서 널리 공유되는 가치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수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소수자가 될 것이다. 다수자가 소수자를 만나는 방식이 법이고 법은 실제로 다수자의 편이다. 그런데 요즘 다행스러운 것은 오래도록 가위눌려 왔던 소수자들이 이제야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좋은 조짐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혹시 다수의 견해를 그저 옳거니 하며 살지 않았나를 진지하게 곱씹게 한다. 지금까지의 인권은 대체로 다수자를 중심으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수자 중에서도 권리를 온전하게 누리지 못하는 집단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다수자의 인권이 국가권력을 상대로, 국가의 범죄와 부정을 비판하는 방향에서 제기되었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 런데 이러한 시각에서는 뭔가 본질적으로 결여된 부분이 있다. 우리의 유명한 구호 속에서도 소외되어 버린 우리네 이웃들이 도 처에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여호와의 증인 교단에 속하는 성우 양지운 씨가 부인과 함께, 훈련소에서 총을 잡지 않았다는 이유로 항명죄인이 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아들에게 면회 가는 장면을 보았다. 거기에는 또 다른 어린 두 아들이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 그리고 그 예비단계인 군사훈련에 결단코 참여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들은 집총거부를 신이 명령한 바라 믿고 오늘도 감옥에서 3년을 보내려고 징집영장을 들고 훈련소로 찾아간다. 이렇게 해서 현재 전국 교도소에는 1600여 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소수파 교단으로서의 사회적인 어려움도 그렇고, 특히 안보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국가로부터 적대적인 취급을 받아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수십 년 전에도 반복되었지만 그들이 소수자이기 때 문에 전혀 정치적인 문제로 환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뭔가 행동을 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뭔가를 하지 않는다면 양지운 씨의 어린 두 아들은 장차 교도소로 갈 예비 자일 뿐이다. 여기서 종교적 다수자로서 가톨릭 신자들의 책임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는 으레 소수자의 입장을 부인하려는 사람들이 여론과 권력을 독점하고 더욱 모질게 소수자를 도덕적 파탄자로 몰아친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교리를 지키려고 총을 잡기를 거부하는 것 은 의문의 여지 없이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전세계가 한 나라로 통합되어 상호 적대행위를 영구 적으로 중단하지 않는 한에서는 개별국가들이 국민에게 국방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집총거부권이 언제부터 문제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영국의 청교도 혁명기에 수평파의 ‘인민협정’ (1649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평파는 식민지 미국에서 퀘이커 교도로 발전하였다.) 청교도 혁명 당시 전쟁과 신앙이 교차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양심적 거부 권은 당연한 요구사항이었는지 모르겠다. 이 일은 그러니까 지금부 터 350여 년 전에 일어났다. 신앙의 자유는 모든 자유의 근원이고, 서양의 근대사를 가로지르는 문제였다. 우리에게는 사실 종교가 개 인의 인생과 공동체의 근본문제로서 그토록 치열하게 제기된 적은 없었다. 어쨌든 서구의 대다수 국가들은 쓰라린 역사적 체험 위에서 양심적 집총거부권을 기본적인 인권으로 확립시켰다. 이에 비추어보면 종교적인 이유로 또는 양심상의 이유로 도저히 총을 잡을 수 없다는 사람에게 항명죄를 적용하여 간단히 3년씩 감 옥에 보내는 우리의 실정법은 실로 충격적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군대 가는데 특정집단이 교리상의 이유로 군대 안 갈 특권을 누리게 할 수 없다는 우리들의 냉랭한 시선이야말로 국가가 그들의 인권을 무시하도록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타인의 신앙이 부인되도록 방치하는 우리의 태도는 나와 다른 모든 신앙을, 마지막에는 우리 자신의 신앙마저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비단 종료의 자유에만 해당하는 논리가 아니다. 타인의 권리가 부인되어도 총총히 지나칠 수 있다면 결국 우리 자신이 존엄한 자라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는 것이다. 권리는 언제나 지금 고통받고 박해받는 자의 몫이고, 그들 에게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기 위한 우리의 연대는 결국 우리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우리 자신의 인권이다. 한 개인이 인간으로서 공동체에 봉사할 기회를 감옥에서 탕진하게 하는 일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그 개인에게 중대한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을 감옥에 보내는 대신에 군사적 목적을 지니지 않는 여러 가지 사회적 봉사활동에 복무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범죄자의 낙인을 하루 속히 벗겨주고 우리의 이 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규정한 독일의 ‘민사대체복 무법’은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을 제정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이 조속히 제정되도록 캠페인을 전개할 의무는 신앙상의 다수자인 가톨릭 신자들의 몫이다. 그리고 이러한 캠페인을 통해서, 곧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모두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되고, 세상살이의 참 맛을 느끼지 않을까. 내 신앙이 또 다른 신앙으로 고통받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내 신앙은 정녕 무엇에 쓸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