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2001년 2월 25일 일요일 오후 11시 11분 06초 제 목(Title): [한백설교] 황진구 광우병 투병기 2001년 2월 25일 한백의 소리 황진구 광우병 투병기 황 용 연 때 : 통일염원 56년 팔백 네번째 예배에서(2001.2.25) 본문 : 요한복음서 3장 1~3절/ 곳 : 한백교회당 요한복음서 3장 ○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의회원이었다. ○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표준새번역) 대학 시절부터 심심찮게 '평론가'라는 말을 듣고 살았습니다. '실천'을 강조하는 집단에 소속해 대학 시절을 보내고, 때로는 그 집단의 중심부에 있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집단의 '실천'에 대해서 때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할 때도 없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 이유가, 지식을 추구하기를 좋아한 편이라는 것에 있으며, 또한 그렇게 추구한 지식에 근거하여 그런 유보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평론가로 살기보다는 실천을 해라'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지요. 물론 그 때는 상당히 어렸습니다. 그래서 그 때 추구한 지식이나 그 지식에 근거하여 가진 견해들을 지금 돌이켜 보면, 상당히 낯뜨거울 때가 많습니다. 당연히 그 때 '평론가'란 말에 좀 야속했던 마음도 지금 와서 보면 그렇게 야속해할 것만은 아니었는데 싶긴 하지요. 그렇지만 결국, 지금 이렇게 낯뜨거워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지금 와서 그 때 너무 야속해하기만 했다고 반성할 수 있는 것도,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해 온 것이 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먹물'이라는 말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해 보시기도 하셨겠죠. '먹물'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세 가지 정도의 뜻을 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식'을 사용해서 여러 가지 '특권'을 취할 수 있는 존재. 그 '지식'이란 것이 정작 실제 세상 돌아가는 데에는 아무 쓸모도 없더라는 역설적인 '무지'로 가득찬 존재. 그래서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결국 배운 건 많고 아는 건 많은데 실제로 실천은 하나도 안 하는 '위선'적인 존재. 이런 의미가 아닌가 싶은 거지요. 최근 한 편의 드라마가 또다시 이러한 '먹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 '먹물'들과 싸우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아줌마}를 딱 한 번 밖에 못 봤습니다. 한데 그 '한 번' 가지고도 정말, 그 속에서의 '먹물'들은 같은 '먹물'인 저의 얼굴까지 화끈거리게 하더군요.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이야기지만, 장진구라는 인간이 일종의 '진보 냄새'까지 풍기는 인간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줌마}를 보면서 나오는 '역시 배운 놈들이 더 해'라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공감을 하게 됩니다. '먹물'이라든지, '역시 배운 놈들이 더 해'라든지 하는 이야기 속에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지식'이란 것이 실제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아무 쓸모도 없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식'과 실제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분리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사실은 '지식'이란 것은 '실제 세상 돌아가는 것'과 일정하게 분리되지 않으면 아예 생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실제 세상 돌아가는 것'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그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를 살피고, 그 살핀 결과를 적절하게 체계화함으로써, '실제 세상'을 조금 더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다시 '실제 세상 돌아가는' 데로 한 걸음 다가서 결합하는 것, 이게 바로 '지식' 아닙니까? 그렇다면 '먹물'이라고 비난하면서 '지식'이 '실제 세상 돌아가는 것'과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한 비판이긴 하지만 무엇인가 빠져 있는 비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제는 과연 '지식'이 '세상 돌아가는 것'에서 제대로 '분리되어 있는가', 그래서 성실하게 자신을 발전시켜 가는가, 그 결과로 다시금 제대로 결합하고 있는가를 묻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식'이란 게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총체적으로 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어차피 세상의 '권력'들이, '지식' 그 자체를 '세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기고, 그래서 '세상'을 지배하는 유용한 도구로 여기고 그렇게 써 먹고 있다면 더더욱이나. 최근에 딴 나라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광우병'이 우리 나라에서도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유럽 땅에서 광우병 때문에 도살된 소의 쇠고기를 북조선에 원조한다는 이야기들이 들리고 있습니다. 요즘 유럽에서 쇠고기를 가장 많이 사 먹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노후연금 생활을 하고 있는 노인들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여기서 '초식동물에게 육식을 시켜서 생긴 자연의 복수다'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광우병' 소동이 일어났을 때, '당국'과 '전문가'들이 '이러이러한 과학적 이유가 있으니 광우병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 말이 사실 거짓말이나 틀린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한 '전문가'들이 장진구와 같은 '위선자'들은 아닐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정작, '광우병'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걱정을 덜어 주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과학적 지식'이란 것이, 설령 그것이 맞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없다는,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초식동물에게 육식을 시켜도 된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는 길이다'라는 '과학적 지식'이, '세상을 지배하는 유용한 도구'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해 온 것이, 그래서 사실상 그 도구를 사용하는 자들에게 독점된 지식이었던 것이, 그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독점된 '과학적 지식'의 뒤안길에는, 이제 고기를 얻기에 쓸모없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흙으로 돌아갈 땅조차 찾지 못하고 집단도살당하는 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런 소고기라도 먹어야 되겠다는 북조선 사람들이나 유럽의 노후연금 생활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인간의 오만함'에 자연이 보내는 경고를, '다른 인간'이 몸으로 때워야 하고, '다른 동물'이 몸으로 때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광우병을 낳은 축산업'으로 상징되는, 우리 시대의 '지식'의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지식'에 대한 문제제기는, 곧바로 우리 시대 자체의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니고데모를 바리새인이며 의회 지도자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은 그가 당대의 팔레스틴 사회에서 지식과 권력의 최고 상층부에 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귀하신 몸'이, '율법을 알지도 못하는 무리'(요한 7:49)의 두목인 한 갈릴리 촌놈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옳게 실현하고 있는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예수는 이렇게 말하는 니고데모더러,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뭔가 헛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가는데, 정작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어쩌면 예수가 하려 했던 말은 '그거 정도로는 안 된다'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권력'의 최고층인 의회원, 그리고 '지식'의 최고층인 바리새인. 언젠가 한 번 말씀드렸듯이 당대의 팔레스틴 사회에서 위선자이기는 커녕 가장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 더군다나 그 중에서도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 그러나, 예수와 함께 하는, 한 갈릴리 촌놈과 함께 하는 운동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런 '양심있는 권력자'의 자리라고 하더라도 안 된다는, 그런 이야기 아니었을까 싶은 겁니다. 과연 그 자리에서 정말로 '거듭나야' 한다는, 거듭날 수 있겠느냐는, 그런 이야기였다고 생각이 드는 겁니다. 엊그제 저는 얼마 전에 본 한 시험의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받게 되는 인허장 중에 이런 문구가 있어요. '설교할 자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설교할 자격'이란 건, '교회'라는 한 사회 체계 안에서 '지식'을 형성할 수 있는 자격이란 건, '목회자'에게만 부여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목회자'들이 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거고, '목회자 아닌 사람들'은 그 '말씀'을, 그 '지식'을, 잘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지요. 저는 한 번도 저의 하늘뜻나누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좀 과격하게 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설교'는 '사탄의 말씀'을 '대언'하는 게 된다고 생각해요. 오직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저의 말'을 준비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저의 말'이 다른 이들의 마음과 만날 때,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물론 '다른 사람의 말'도 그런 '하나님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지요. 이른바 '목회자'라는 저의 말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아니, 오히려 종종 저의 말보다 더 잘. 그러나 저는 엄연히 '목회자'를 만드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저도 이제 '교회'의 체계 안에서 지식의 기득권자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러기에 저도 저의 삶의 한 구석에서 교회의 체계 안에서의 '권력'에 공모를 하는 부분이 없지 않게 될 겁니다. 어쩌면 때로 이런 식의 그럴 듯한 말 때문에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을 그 '권력'에 효과적으로 순종하게끔 만들지도 모르지요. 그러기에 저의 삶은 어쩌면 이제부터 하나의 '투병'이 될 것 같습니다. 하나의 '직업'으로서의 '목회자', 그리고 하나의 '삶의 내용'으로서의 '지식인'. 그래서 그 '직업'과 그 '내용'을 충실히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충실히 살아가기 때문에 그 한 구석에서 '투병'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삶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지식'을 만들어 가는 주체가 되어서,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사회의 주체가 되게끔 세상이 '거듭나서', 저처럼 '투병'을 하는 사람이 더 이상 없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저 스스로 '지식'을 끊임없이 만들어 갈 것입니다. '지식인'으로만이 아닌, 동등한 '지식'의 주체인 한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SCA!----http://www.hanbaik.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