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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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2001년 1월  9일 화요일 오후 10시 55분 39초
제 목(Title): [한백설교] 이교주의


2001년 1월 7일 한백의 소리

이교주의 


김 진 호
 

때 : 통일염원 57년 칠백 아흔일곱번째 예배에서(2001.1.7) 
 
본문 : 루가복음서 5장 21절/ 곳 : 한백교회당

 

루가복음서
5장
 
이 말을 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이 누구인데 저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해가 바뀌었습니다. 일상적 관념이야 어떻든 역사상의 시기구분법에 따르면, 
새로운 한 세기의 시작이며, 또 한 천년대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마침 해의 첫날이 
공교롭게도 월요일이었으니,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하늘의 주문 같기도 합니다. 
그런걸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우연히도 1일 새벽, 보신각 종이 울리던 그 어간에, 
저는 종로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워를 연상케 할 만큼 도로는 꽉 막힌 
상태였고, 사람들의 바다에 휩쓸리지 않고 길을 가는 게 난망할 지경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먼저 빠져나가려는 차들, 길가로 주차하려는 차들, 승객을 태우려고 
차선을 가리지 않고 마구 서 대는 택시들이 있는 한, 질서 정연한 도심의 야경을 
편안하게 느낄 도리는 없었습니다. 길 양편 인도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 
가거나 길가에서 해의 시작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폭죽소리가 요란한 밤입니다. 늘 
그렇듯이 축제의 밤은 자유의 욕구가 분출합니다. 한데, 대개 그렇듯이 그날도 
타인에 대해 무배려한 자유로움만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호각소리 또한 
요란스러웠습니다. 질서를 구축하려는 권위의 소리와, 무질서를 향유하려는 방종의 
소리가 한데 어울려 그날의 소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앰블런스 차량이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며 지나갑니다. 뭔가 가까이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신호입니다. 첫날 
새벽에 화를 당한 재수 옴 붙은 그는 누굴까? 잠시 궁금했지만, 이내 이 난장판을 
얼른 빠져나가고픈 생각에 말려들고 맙니다. 
무슨 한 해의 시작이 이런가,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첫 새벽을 보내고야 
말았습니다. 괜히 시내로 나갔다는 후회가 듭니다. 하지만 새벽 종로 거리만이 
해의 시작에 대한 저의 인상을 지배한 것은 아닙니다. 정치인들의 작태는 도를 
점점 더해가고 있을 뿐이니, 그네들에겐 해의 바뀜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 
분명합니다. 미담이라곤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동네가 바로 그곳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곳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덮쳐버리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으니, 연애인들 가십처럼 무관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보며 
보내야 하는 출발점의 심정이란 '더럽기' 이를 데 없는 기분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지난 몇해 전부터 자본의 공포스러운 속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절정을 향해 가야할 길이 먼 듯이 각인되는 새해의 첫 하늘을 
보아야 했으니 말입니다. 자본이 국경을 너머 세계 곳곳에 그 질서를 구축하는 
이른바 '자본 네트워킹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구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생각도, 아니 무의식까지도 
자본의 질서에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과 마주쳐야 하는 
사회생활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중에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질서의 강박을 받으며 지내야 합니다. 실은 많은 경우에는 그것이 강박으로조차 
느껴지지 않은 채 자본의 하수인다운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요컨대 사회 전체가 
'시장'이 되어가듯, 우리 몸 자체 또한 '시장'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한데, 그 
파괴적 힘은 아직 절정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더 지배해야 하고, 
아직도 더 많이 파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자본-유일신'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유일신은 더욱 넓게, 더욱 많이, 더욱 깊게 확장된 영토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는 해의 시작을, 그러한 가공할만한 유일신 종교의 확산이 
적어도 한동안은 지속될 것을 절감하며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저는 2001년도 첫 '하늘뜻나누기'를 하게 됐습니다. 제가 보는 한 
예수님은 유일신 종교에 감염된 세계와 대결한 분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이 
속한 텍스트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이른바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 이야기'로 알려진 텍스트입니다.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이 텍스트에서 우리는 공히 네 부류의 등장인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일행), 군중, 중풍병자(일행),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그들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나온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있어, 마태오복음서와 마르코복음서는 
율법학자라고 모호하게 말하고 있는 데 반해 루가복음서만은 넌즈시 그들이 
예루살렘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즉 이 텍스트 속의 논쟁은 예루살렘 종교와 
예수(의 신앙)간의 대결의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정적은 다양한 
유다교의 양상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유다교 전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끌고 가는 것은 중풍병자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자신의 몸조차 통제할 수 없는 자입니다. 몸은 인간이 세상과 접하는 존재의 
부위입니다. 몸을 통해서 인간은 세상을 경험하며, 몸을 통해서 인간은 세상의 
질서를 각인합니다. 몸을 통해서 인간은 세상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데 이 
사람의 신체는 '세상의 몸의 질서' 외부에 있습니다. 그의 몸은 경험할 수 없고 
세계의 질서 속에 포함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의 몸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으로부터 배척된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집회를 하고 있는 집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는 예수님께로 가야했습니다. 그래야만 그가 예수님으로 인해 그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얻을 수 있겠기에 말입니다. 그래야만 그도 세상의 몸의 질서 
속에 편입될 수 있고, 그래야만 그도 세상에 속한 자로서 살아갈 수 있겠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다가갈 수 없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자가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텍스트 속에 담긴 하나의 갈등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를 필요로 했으나, 사람들로 인해 다가가는 
길이 차단된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좀더 추상적으로 사람들의 편견으로 인해 
'개인적 장애'가 '사회적 장애'로서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구원받기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내쫓고 세상에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로 채워진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병원이 치료받아야 할 
사람들을 내쫓고 스스로를 훌륭히 보호할 수 있는 사람들로 채워진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학교가 배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내쫓고 잘 훈육된 사람만으로 
채워진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로 그러했던 것입니다. 
뜻밖에도 중풍병자는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내집니다. 문으로는 
결코 예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무지 출구가 없었기에, 
편법이 필요했습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조건만으로는 안 되는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특혜적 기회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보며 선언합니다. "네가 구원받았다." 그는 중풍에서 낳기를 
바랐으나, 예수님은 그에게 구원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몸의 질서에 
편입되고 싶어했으나, 예수님은 세상의 질서로부터 해방을 선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의 두 번째 논쟁이 시작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반발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그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님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이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로 대변되는 몸의 질서에서 배제된 자들이 그 질서의 
구원체계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는 뜻을 함축하는 주장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말로는 모두에게 기회가 보장되어 있으니, 자신들의 질서관에 잘 순종하라고 
설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그 
질서관을 교란하는 주장을 그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과 대결을 벌입니다. 그를 일으켜 세움으로써, 몸의 통제를 
스스로 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한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몸의 통제를 한다는 
것, 즉 병에서 나음받는다는 것은 곧 세상의 몸의 질서 속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단순히 치료한 게 아니라, 그에게 먼저 구원을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교리의 내면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질서관에 대한 도전입니다. 해방의 욕망을 위해 질서 속에서는 
차단된 그것을 넘어서는 행위, 바로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를 
구원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텍스트 속에는 사람들 및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꿰뚫고 있는 질서관이 
예수님과 대결을 벌이는 장본인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사람들의 관념을 
지배하는 종교 자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견을, 종교의 교리 이외에는 다른 문을 
결코 가설하지 않으려는 전체주의적 신념이 바로 예수님의 적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신학은 그것을 '유일신'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유일신과  대결합니다. 하나의 길만을 주장하는 집착과 
대결합니다. 사람의 마음 속까지 지배하면서, 다른 것은 없다고 설파하는 
교조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유일신 신앙을 해체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이교주의'를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신 없는 세계, 구원 없는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폐적 구원 체계를 넘어서는 
탈신학적 신앙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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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SCA!----http://www.hanbai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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