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2000년 10월 16일 월요일 오전 12시 03분 52초 제 목(Title): [한백설교] 가상현실을 넘어서는 삶의 전면 2000년 10월 15일 한백의 소리 가상현실을 넘어서는 삶의 전면화 김 기 돈 (낙골교회 목사) 때 : 통일염원 56년 칠백 여든다섯번째 예배에서(2000.10.15) 본문 : 마태복음서 20장 22절/ 곳 : 한백교회당 마태복음서 20장 22예수께서 그 형제들에게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 수정증보판 새로움 '수정-증보판'이란 것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약간 수정하고 덧붙혀 펴냈다는 뜻이겠습니다. '수정-증보한 새것'은 일종의 새로움이면서 그 새로움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새것이란 명찰을 달고 있으면서도 결코 새롭지 않은 것'은 무수히 경험해왔던 바입니다. '새롭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은 전혀 바뀌지 않는 시절을 겪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새로움의 진정한 내용에 다가서지 못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포장이나 표면의 색깔만으로 결코 말하거나 드러낼 수 없는 것을 짜 맞추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수정증보판 세상" 속에서 우리는 새로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이라는 표현을 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마태23:27)라고 말합니다. 속에 위선과 불법이 가득한 상태에서 겉치장이나 덧붙임으로 새로움을 가장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움은 "전혀 비교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끌고 다닐 이유가 없는 것들, 경직되고 틀에 박혀 있어 새로움으로 이어질 수 없는 것들과의 결별을 통해 가능한 일입니다. 새로움의 경험에 이르는 어떠한 분명한 '징후', '조짐'이 없이 새로움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새로움의 징후가 있는가, 어떠한 '조짐'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분명하고 맑게 움직이며 파장을 일으킵니다. 새로움의 징표는 생명력과 활동력이 전면화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차림표나 그저 악보로만 남아 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노래로 불려지고, 풍성한 먹거리고 서로에게 나눠지고, 손과 발로 일구어 낸 밭에 씨앗으로 뿌려지는 것, 이것이 변화의 표징이고, 새로움의 징표입니다. 이는 갈아엎은 그 밭에 자신이 씨앗으로 뿌려지는 일입니다. 뿌려진 씨앗을 제 몸으로 여기지 않는 농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씨앗으로 뿌리지 않은 농부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뿌려지고 가꾼 삶이 생명 있는 열매로 와락 다가오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땅을 갈아 일구고 그 자신이 씨앗으로 뿌려지고 가꾸어 온 일상을 전제한 열매는 공유된 경험이고, 이로써 '뿌려진 씨앗'과 '가꾸어 얻은 열매'는 일치하는 것입니다. 새로움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변화'를 통해서 누리게 되는 공동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근본적인 내용은 그대로이고 마음속의 심지나 가치에 대한 평가방식도 그대로인데, 옷만 바꿔입거나 표면에 생겨난 약간의 흠집을 때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오히려 낡아지게 하고 퇴색되게 하는 요소들을 전면적으로 거스르는 새로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그것은 삶을 전면화하는 용기입니다. 삶을 전면화 하는 방식으로 새로움을 불러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2. 가상현실을 넘어서는 삶의 전면화 우리가 새로움을 꿈꾸지만 그것이 피도 눈물도 없는 '가상현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새천년이 되었다고 모든 것이 한번에 달라지거나 전혀 '딴 세상'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로움이나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는 늘 있게 마련이지만 직면하는 현실적 경험 없이 오지는 않는 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금의 계절살이 속에 현실적으로 직면하며 아프게 놓여 있습니다. 다만 마음속에 어떠한 기대나 바램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서로서로 희망의 언어를 더듬어 찾아가는 계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서서 일정한 계기를 만들고 의미를 돋우어 '공동체적인 성찰'을 이루어 가는 시간,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의 치열한 계절살이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내다보는 것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새로움이나 새로운 시대는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계절살이는 자신의 바램과 기대를 헤아리는 때입니다.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기대, 우리의 기대는 또한 무엇인지, 이천오 년, 이천십 년에 과연 나는 어떠한 모습일 것이며, 우리 공동체는 또한 어떠한 바램과 열정으로 서 있을 것인가? 내다보는 것은 실로 지금을 살아가는 열정으로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어떠한 말이든 '열렬한 현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램이나 기대 또한 현장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름살이가 무시되면 가을걷이가 허망할 것이고, 겨울살이가 궁핍할 것입니다. 이른바 가을걷이의 내용을 이루는 현장은 여름살이이고, 모든 녹색 생명의 움직임을 전면화하는 이 생생한 살림의 현장 속에서, 바램을 일구고 기대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의 "내다보기"는 구체적인 삶의 열렬한 현장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는 사람들을 그들의 '가상현실'로부터 나와서 구체적인 삶에 이르게 합니다. 막연하고 심정적으로 짚어가는 내용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현장성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직면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없고, 삶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 고 따라야 한다."(루가9:23) 매일 져야 하는 자기 십자가는 발딛고 살아가는 "지금"을 뜻하고, 살림의 열정을 일으켜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뜻합니다. 복음서에 재미있는 광경이 묘사됩니다. 이른바 '청탁사건'입니다. 두 아들을 앞세워 그 어머니가 예수께 나옵니다. 그녀는 장차 두 아들에게 자리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다른 제자들을 술렁거립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 형제를 보고 화를 내었다."(마태20:25) 제자들은 지금 '가상현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권력"을 동일한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권력의 복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둡니다. 기반을 그대로 두고 적당히 수정증보해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하느님나라의 현실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 형제들에게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 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마태20:22) 그들이 청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내리 누르고 강제로 지배하는 권력"입니다. 삶을 전면화 하는 그들의 계절살이를 저버리고, 가상 공간에서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의 허망한 추구로부터 나오라고 말합니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20:26) 스스로 사람에 대해 겸손해 지고, 서로를 섬김으로 삶의 가치를 나누는 생생한 현장 속에 하느님나라가 실제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가상 공간에서 나와서 열렬한 현장성을 가지면 바르게 볼 수 있고, 거기에서부터 바르게 내다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다보는 것은 가상 현실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고 만나고 부딪히며 연대하여 움직이는 지금의 자리에서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요한4:23)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고린도6:2) 지금이 그것을 살아가는 적절한 때이며, 생생하고 현장감 있는 섬김의 손과 발로 새로운 시간을 내다보는 때입니다. 터무니없는 권력의 가치에 근거를 둔 허망한 추구가 아니라 사람에 겸허하게 다가서서 온기를 느끼고 나누는 현장성을 잃지 않는 것, 바로 그러한 열정이 우리의 바램과 기대를 균형 있게 채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일상적 삶을 '통틀어서' 현장성을 담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새겨 읽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빌립보1:20) 가상 현실에서 나오기, 이것은 지금의 삶을 통틀어 살아가며 새로운 시대를 내다보는 '희망찾기 선언'입니다. 그것은 지금을 우리의 전부로 여기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을 살아가면서도 추상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실로 우리의 전부입니다. 이른바 희망은 지금의 삶을 전면화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삶의 전면화는 열렬한 관계와 가슴과 삶의 연대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드러냅니다. 3. 생명적 징후를 살려내는 가슴과 삶의 연대 새로움을 이루어 가는 삶의 전면화는 그 '생명적 징후'를 살려내고 그 조짐을 읽어내어 '서로를 살리는 가슴뭉클한 연대'를 통해서 보다 사람답고 생명적인 내용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생각의 연대에서 '가슴과 삶의 연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생각만 머물고 가슴까지 와 닿지 않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절박하고 뛰어가야 하고 그렇게 다가서야 하고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생각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손과 발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의 연대에서 가슴의 연대로, 삶의 연대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살리는 살림의 사람들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어느 작은 마을에 장례식이 거행됩니다. 정부군에 의해서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장례식에서 그들을 사랑했던 참석자들의 이름이 호명됩니다. 그들은 차례로 대답을 합니다. "여기 있습니다.(프리센테!)" 그런 다음에는 이번에는 정부군에 의해 죽어간 희생자들의 이름이 차례대로 호명됩니다. 그 때 참석자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죽은 자들을 대신해서 "나 여기에 있습니다! 프리센테!" 라고 대답합니다. "그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지금 여기에 우리 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이제 죽어간 사람들의 과제를 함께 떠맡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죽어간 사람들이 활동했던 탁아소에서, 병원에서, 학교에서 그들의 벗들은 "나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일할 것입니다. 실로 가슴뭉클한 연대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17:22) 간절하게 하나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은 '지적동의'가 아니라 기꺼이 서로의 삶에 다가서고 참여하는 하나됨입니다. 이는 생명적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만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살림의 관계를 만들어 가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생명적 관계', '살림의 연결성'은 가슴이 통하고 삶이 어울려 서로에게 힘이 되는 '삶이 전면화된 관계'입니다. 뒤숭숭하고 속깊은 아픔이 도드라지는 이 시절을 걸으면서 '생각의 연대'를 넘어서는 '가슴과 삶의 연대'를 생각합니다. 삶과 관계를 전면화하며 이루어 가는 변화와 새로운 현실을 생각합니다. ♣ --------------------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SCA!----http://www.hanbaik.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