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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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66.tnt3.sea> 
날 짜 (Date): 2000년 10월 13일 금요일 오후 12시 19분 06초
제 목(Title): 김영민/ Y, 혹은 종교와 관능 5


[김영민] [철학갸-론]제1장: 'Y혹은 종교와 관능'⑤ 

나는 내 눈에 마땅찮은 부류의 종교인들을 두가지 타입으로 뭉뚱그려본 적이 있다. 
하나는, "종교적 엄숙주의에 골몰해서 풍요한 삶과 인성의 성숙을 놓치는 
타입"이고, 나머지 하나는 "반(反)종교적 종교인으로 반동적 냉소와 위악 속에서 
독단만을 배양해가는 타입"*이다. 
엄숙주의는 엄숙 그 자체가 지니는 종교적 모멘트를 오히려 죽이는 역효과를 낸다. 
이것은, 진정한 권위와 권위주의가 한 데 어울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혹은 
아렌트(Hannah Arendt)의 말처럼, "권력의 상실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과 닮았다. 하지만, 마치 "좌선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외물(外物)의 
유혹과 침탈로부터 마음을 지키기 위한 불교의 기초 수련"***이듯이, 엄숙이나 
조신(操身)도 그 운용과 근기에 따라서는 결실에 이르는 적절한 배양의 과정일 수 
있다. 문제는 엄숙이 엄숙주의로 굳어지면서 방편이 마치 목적의 증표인양 
둔갑한다는 데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식의 엄숙주의는 필경 "딱딱한 것들은 
죽을 것들이라"(堅强者死之徒)고 했던 노자의 손바닥 속에 들 것이다. 

당연히, Y는 그 어느 쪽과도 상관이 없었다. 겉가죽만 놓고 보자면, 엄숙주의나 
냉소주의는 겹치는 부분이 없이 따로 갈라서있는 듯하다. 그러나 둘 다 
정신주의(mentalism)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상호 뒷거래의 가능성이 있다. 마치 
재야의 운동꾼이 홀연히 여당의 정치인으로 둔갑하듯이, 이러한 종류의 뒷거래는 
여러 분야에서 그 사례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그들은 '진리'라는 기이한 
유기체를 따로 섬기면서 종종 서로를 욕하지만, 실은 '권력감정의 상승'이라는 
정신주의 속에서 서로 깊이 교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주의의 차원을 훌쩍 떠나버린 관능주의라면 문제가 사뭇 달라진다. 
"이념의 진보, 생활의 보수"라느니, "정치의 진보, 문화의 보수"라는 등의 말이 
떠돌듯이, 정신주의라는 정신적 허위의식에 물든 사회에서 관능주의만큼 입맛에 꼭 
들어맞는 공적(公敵)은 없다.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남으로써 
실질적으로 국가보안법이 깨지는 상황에서도, 이현세는 여전히 외설혐의로 
잡혀들어 가듯이 말이다.) 따라서, 어쨌든 그녀가 그 미세한 조짐을 흘리고 다녔던 
종교적 관능주의(?)는 그 열정이나 내적 진정성과 무관하게 오해와 박해의 출혈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낮/밤, 배꼽의 위/아래, 사원과 교실의 안/밖을 
가르는 도덕의 이중잣대가 공공연한 우리 사회에서, 은폐되지 않은 관능주의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특히 그 잣대의 한 쪽을 니체가 
"교수형리(絞首刑吏)의 형이상학"****이라고 조롱했던 교회에서 감히 
관능주의라니! 

다소 곁가지를 치는 얘기이지만, 이 교수형리의 형이상학과 이웃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시(戰時)의 심리학'(a wartime psychology)이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을 빗대어 이를 재미있게 묘사한 대목이 있어 잠시 소개한다: 

제네바 시의 분위기는 '전시 심리학'으로 팽배해 있었다.
종교개혁의 주체세력들은, 신의 명령에 따라 창성한
후손의 축복을 약속받았던 그 자신의 아들을 죽여
번제(燔祭)에 바치려고까지했던 아브라함을 모델로
삼아 스스로의 마음을 모질게 다잡았다. 구약성서
에서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잡으려고 칼을 높이
쳐들었을 때 천사의 음성이 그들 제지했고, 마침
덤불 속에서 제물로 쓰일 양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에는 대체로 이런 양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기독교의 전투적 선교주의는 이미 유명하다. 신을 선교사의 일종(missio 
Dei)으로까지 윤색한 그 도저한 선교주의적 자기긍정은, 가령, 그 개조(開祖)를 
'똥닦는 막대기'로 표현하거나 살불살조(殺佛殺祖), 혹은 "부처를 말했을 때는 
사흘 동안 입을 씻어라"고 하는 불교식의 자기부정과 너무나 판이하다. (물론 
이러한 대조는 한국 종교계의 현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개신교에 돌목사들이 
횡행하는 것만큼 불교에는 땡중들이 맹활약이니.) 하여간, 기독교적 선교의 
일방성과 시혜의식을 정당화하는 이미지들은 흔히 전투적으로 착색되어 있다. 

한 쪽에서는 '기독교 후기'를 쉽게 떠올리는 지금이지만, 역전이나 지하철 속을 
단기(單騎)로 진군하면서, 천국의 복음과 지옥의 협박을 목청껏 병창(竝唱)하고 
있는 이 땅의 전투적 선교주의는 아직도 시들지 않고 있다. 요컨대 이 심리학이 
'군사 메타포'(military metaphors)를 통해서 그 협소한 신앙양심이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을 거칠게, 반응형성(reaction-formation)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을 
어렵게 않게 간취할 수 있다. 


絞首刑吏의 형이상학 ---- 戰時 심리학 ---- 軍事 메타포 


*김영민, "종교와 도덕적 이중성," 문화·문화·문화 (동녘출판사, 1998), 81쪽.


**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김정한 옮김 (이후, 1999), 88쪽.
***한형조,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나" (여시아문, 1999), 215쪽.
****F. Nietzsche, The Portable Nietzsche, tr. Walter Kaufmann (New York: The 
Viking Press, 1966), p. 500.
*****Roland H. Bainton, The Travail of Religious Liberty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ers, 1958), p. 71. 


초청칼럼니스트 김영민 jajaym@hanmail.net
한일대학교 철학과 부교수/저서 <지식인과 심층근대화>(1999)외 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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