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2000년 10월 4일 수요일 오후 08시 40분 49초 제 목(Title): [한백설교] 망각의 즐거움, 그리고 디스토� 2000년 10월 1일 한백의 소리 망각의 즐거움, 그리고 디스토피아 김 진 호 때 : 통일염원 56년 칠백 여든세번째 예배에서(2000.10.1) 본문 : 열왕기상 21장 27절/ 곳 : 한백교회당 사무엘기상 25장 아합은 이 말을 다 듣고 나서 자기 옷을 찢으며 굵은 베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굵은 베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일어나 거닐면서도 풀이 죽어 있었다. [공동번역 성서] ㅂ씨는 직장생활 16년 차로 중소기업인 모 회사의 차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내와 초등학생인 딸 둘을 가진 30대 끝부리의 남자입니다. 학창시절 그는 상당히 우수한 실력을 갖춘 학생이었고, 운동을 좋아했고, 특히 축구는 수준급인 청년이었습니다. 이공대 출신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얌전하고 대인관계에선 조금은 소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과제에 대해선 독하리만큼 적극적으로 처리하는 그런 성격의 사람입니다. 방위산업체에 입사해서 군대를 면제받았고, 이제까지 세 번 이직하면서 비교적 평탄한 직장 경력을 쌓아왔습니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땐, 자신보다 거의 이십 년 가까이 연장자인 고졸출신 하급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동급의 선배 사원들은 하위직급자를 잘 길들여야 직장생활이 순조롭다는 조언을 했고, 종종 가혹한 주문을 해서 골탕을 먹이도록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연상의 하급직원은 여러 형태로 그를 무시하면서 자신의 위세를 부리려 했습니다. 위계가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서 모범생으로 자란 그에게 이러한 상황은 말할 수 없는 정체성의 혼돈을 일으켰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세월이 1~2년 흐르면서, 그는 점차 그 분위기에 적응하게 됩니다. 곧 그는 선배 직원들의 전통을 후배들에게 훌륭히 전수하는 사람이 됩니다. 직장생활이 12년째 되던 해 그는 세 번째 직장을 구하게 됩니다. 그때가 'IMF 직전'이어서 그에겐 너무나 다행이었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에만 있다가 처음으로 중소기업에서 일하게 된데다, 생전 처음으로 영업 부문에서 일하게 된 탓에, 새로운 분위기에 적응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혔던 것은 구매자를 속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엔 이 일은 '사기'에 가까웠습니다. 모태신앙인으로 집사직을 맡고 있던, 나름대로 충실한 종교인인 그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술자리가 필요 이상으로 많았고, 하위 직원들을 잘 관리하려면 그때마다 만취되어야 하는 분위기임을 깨닫는 것이 십여 년 경력의 중견 회사원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심한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얼마 안 가서 그는 이 분위기에도 잘 적응합니다. 술도 많이 늘었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거래를 할 때마다 술자리에서 동료들과 사장 욕을 진창 해대면서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에 교회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으로 그를 괴롭히던 모든 심적 갈등은 정돈됩니다. 이렇게 해서 ㅂ씨는 한 가정의 책임 있는 가장의 자리를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고, 회사의 간부직원으로서도 대과 없이 직무를 원활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 청년이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면서 중년의 나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ㅂ씨는 한마디로 "얼굴이 두꺼워지는 과정"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은 변화무쌍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처신하는 것을 뜻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단서를 붙이면서 수긍을 합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안는다기보다는 감정이 무뎌져야 한다"고. 문뜩 영화 <박하사탕>이 떠올랐습니다. 1980년 광주에 진압군으로 들어갔던 일, 그리고 고문경찰로서 학생에게 물고문을 가하던 일 등을 주인공 김영호는 두고두고 잊지 못합니다. 그가 특별히 잔인한 성격의 사람이어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오히려 그는 한강변에 난 풀잎 하나를 사진에 담아둘 만큼 섬세한 감수성으로 20대 초를 보내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박하사탕에 담긴 달콤한 첫사랑의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해온 순정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광기의 역사라는 기차를 타야했던 그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시간의 열차를 타고 오면서 그 가학적 역사의 비열한 하수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는 얼떨결에 가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역사의 현장을 지나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은 그를 역사의 피해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는 군대를 제대한 이후에도, 형사를 그만 둔 이후에도, 지속되는 그때의 기억들로 괴로워합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되살아나 그의 가슴을 헤집어놓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1979년의 한강변에서 야유회를 즐기던 한 순진한 청년은 20년이라는 광풍 같은 시간 열차를 달린 뒤, 바로 그 자리에서 자살로 자신에게 내린 역사의 저주를 매듭짓습니다. '상해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ass Disorder)라는 질환이 있습니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어떤 상해를 당한 이후, 그때의 기억을 망각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그것으로 인해 스트레스 장애를 일으키는 증상을 가리킵니다. 요컨대 고통스런 기억을 망각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질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필경 <박하사탕>의 김영호에게 걸렸던 저주의 주문도 의학적으로는 바로 PTSD였을 겁니다. 노마 마사이키라는 일본의 한 정신과 의사는, {전쟁과 인간.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이라는 책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을 날렸던 군인, 헌병, 의사 등을 탐문조사하면서, 왜 그들은 PTSD로 시달리지 않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 가지로 연구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천황제'라는 이데올로기의 효과였습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잔혹행위를 정당화하는 명분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들은 이 이데올로기의 효과로, 자신들의 가학적 행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때 이데올로기는 경험을 '망각'하도록 하는 일종의 체루제 역할을 합니다. 노마 박사는 이러한 현상은 일본인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주된 특징의 하나라고 보면서, 그것은 일본인의 쇠약한 정신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성찰을 방해하고, 자기 중심주의적이고 타자에 대해 배타적이며 공격적인 가학성을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적 본능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ㅂ씨를 떠올렸습니다. 아니 ㅂ씨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보통사람들의 성장사를 떠올렸습니다. (물론 저도 거기에서 제외될 수 없겠지요.) 부정·부패로 얼룩진 사회 속에서, 경쟁욕구에 의해 누군가를 가해하도록 조건지어진 사회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윤리적 감각의 마비를 통하지 않고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삶을 살아온 우리들의 성장사를 말입니다.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역사의 패륜자들을, 국민적 부를 대규모로 착복함으로써 치부에 성공한 파렴치한 흡혈귀들을 기소하라고 소리치던 순간에도, 그들이 쳐놓은 함정에 자발적으로 빠져들어가 공범자가 되어버린 우리의 부끄러운 이력을 ㅂ씨의 얼굴 속에서 읽어내게 됩니다. 아마도 우리에게도 용한 환각제가 있었을 테지요. 노마 박사가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연관된 쇠약한 정신구조라는, 일본인을 망각의 강으로 안내했던 체루제를 찾아냈던 것처럼, 우리도 잘 돌아보면 그것을 발견할 수 있겠지요. 그랬기에 약한 감정 탓에 괴로워하지 않고, '살만한 세상'(?)을 향유할 수 있었겠지요. 한데 <박하사탕>은 우리가 그 망각의 즐거움에 더 이상 취해있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김영호를 불러내게 하고, 잊고 있었던 김영호의 고통을 되살아나게 합니다. 그러니 이 영화는 디스토피아적인 망각의 비열한 즐거움에 우리가 더 이상 안주할 수 없게 하는, '하느님나라가 임박했다.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추상같은 예언자의 외침인 것입니다. 아합은 왕이면서도 자신의 백성인 한 농민의 땅을 빼앗지 못해 전전긍긍합니다. 왕후의 음모 탓에 그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고통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행히도 당시에는 왕이 마음대로 백성의 땅을 사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정신구조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야훼신앙입니다. 엘리야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그토록 부르짖었던 것은 바로 이런 정신적/신앙적 토대를 무너뜨리려는 음모에 대한 문제제기였던 것이지요. 왕은 왕복을 찢으며 베옷을 걸치고 단식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속죄의식입니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왕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런 류의 사태의 재발을 막는 데 힘쓰겠다는 반성적 고백의 의식인 것입니다. 물론 그 후에도 아합은 많은 이들의 재산을 빼앗았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토록 강력한 통치자로서 역사에 기억될 리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왕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게 하는 전통이, 그 풍요로운 사회의 얼굴이 아직은 간직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야훼신앙은 우리네 사회와 그 속에 편승하고 있는 교회와는 사뭇 다른 전통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앙에 기초한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찬송이, 우리의 예배가, 망각의 즐거움이라는 환각제로 유혹하는 세상을 기소하는 예언의 목소리로 살아남아야겠습니다. ♣ --------------------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SCA!----http://www.hanbaik.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