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1Cust157.tnt4.se> 날 짜 (Date): 2000년 9월 18일 월요일 오전 05시 08분 46초 제 목(Title): 김영민/ Y, 혹은 종교와 관능 4 [김영민] [철학갸-론]제1장 : 'Y 혹은 종교와 관능'④ Y의 동아리는 그 선택의 형식성에서만은 근대적인 구석이 없지 않았으나, 그 내용에서는 좀처럼 떨쳐버릴 수 없는 또 다른 전근대의 늪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Y의 존재는 그 늪의 저변을 감싸쥐고 있는 바닥없는 뿌리같았다. 그러나 Y의 이채로움에 너무 현학적인 주석을 곁들일 생각은 아니다. 그저 그녀는 당시의 교회분위기에서는 매우 별스런 존재였다는 뜻이다. 사실 20세기의 여러 고명한 진보신학자들의 글을 탐독하면서 나름대로 '진보적'이라 자신했던 나를 중심한 몇몇 친구들의 눈에는 그저 재미있을 정도로 '별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교회 회중의 대다수는, 매사를 '은혜롭게', 혹은 두리뭉실하게 품어가려는 교회 공동체의 속성상 그녀를 대놓고 언힐(言詰)하거나 내칠 수는 없었지만, 내심 위험하거나 '상스럽게' 여기며 조심스럽게 '경건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은 Y가 몰고다니는 묘한 관능적 분위기에 질색하곤 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비가들이 남긴 문헌 속에는 영성과 관능 사이의 관계를 시사하는 글*이 적지 않다. 그리고 알다시피 밀교(密敎)의 분파에서는 '지극히 상스러워서 오히려 지극히 경건한' 종교행위가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르쥬 바따이유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권 밖의 다른 종교들은 에로티즘에 신성과 종교성을 부여했으며, 거기에서는 수치심보다 오히려 신성이 지배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도의 사원에서는 아직도 돌에 새겨진 에로틱한 형상을 많이 볼 수 있다. 거기에서는 에로티즘이 신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인도의 사원들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외설들을 경건하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물론 Y가 육감적이거나 때로 노골적인 여성을 드러내는 것을 이처럼 방자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뜻도 아니다. 더욱이, "무릎꿇고 기도하던 중에 신비한 희열을 느꼈으며 당시에 그녀는 그것을 신의 강림으로 믿었"지만, "나중에 남자를 만나고 나서야 그녀는 그것이 남자와의 성교에 의한 성적 오르가즘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음을 알았다"***거나, "사실 힌두교도들은 탄트라 예배 중에 성적 자극의 도움을 받아 신비체험에 도달한다"****는 식의 유추(類推), 혹은 근자 만탁 치아(Mantak Chia)에 의해 대중화되고 있는 도교적 섹스 수련법과 관련된 연상 따위를 부추길 생각도 아니다. 필경에는 이런 종류의 논의가 종교성의 발현에서 몸이 차지할 자리를 따지는 문제로 이어질 것이리라. 섣부른 느낌이 있지만, 종교의 자리와 몸의 자리는 일견 대극적이되, 실은 그 상극(相剋)의 외피가 거대한 원환(圓環)을 이루며 내밀한 상생(相生)을 이루어간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어떤 인간이 더 희박해져가고, 휘발(揮發)해 가면 갈수록 그 가치는 한층 더 증대한다고 믿는"***** 플라톤주의에서 기독교로 이어지는 탈/반육체적 전통의 바로 저쪽에는, 육체적 풍성함의 극치인 엑스터시(ecstacy)를 정점으로 하는 종교(ecstatic religion)******가 연면히 맥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나름의 계몽을 통해서 인순고식(因循姑息)은 넘어섰을지라도, 종교적 금욕주의를 기저에 깐 과도한 정신주의자였던 우리들에게 그녀의 '몸놀림'이 그리 편하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기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몸놀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때가 언제 있었던가. 내가 확인한 것도 아니고, 또 확인할 수도 없는 소문이지만, 청교도주의적 금욕주의 속에서 성장한 여성---필시, 목사나 장로의 딸로서, 하아얀 얼굴에 그지없이 조신스럽고, 생머리를 길게 늘인 채 말없이 조곤조곤 피아노반주에만 열심이던 그 아가씨---이 결혼 후에도 남편과의 성합(性合)조차 자신의 신앙양심을 훼절하는 불결한 행위로 여긴 나머지 결국 성생활을 망치고, 급기야 혼인을 위기로 몰아가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돌고 돌아 온 입소문이니 입거품이 심하게 엉켜붙은 것이긴 하겠지만, 내가 아는 어느 목사의 아내는, 밤일을 치를 때마다 절대절명의 기도라도 하듯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맞잡아 가슴 한 가운데로 모으고는, 마치 강간이라도 당하는 듯이 처연하고 급박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그 젊고 건강한 목사가 도무지 재미를 볼 수 없더라는 이야기. 재? 結「?국한시킨다면, 차라리 1994년 조계종 분규당시 쫓겨난 서의현 총무원장같이 은처(隱妻)하는 권력승(權力僧)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꼭 이런 극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삶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관념의 조직과 회집(會集), 그리고 조작에 앞서, '몸의 자리매김'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유행처럼 논란되고 있는 '근대성 비판'도 실은 그 중요한 갈래의 하나가 바로 몸의 자리매김에 다름 아니다. 역사적 기독교가 빠져든 오류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 문제였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영혼'으로 시작하는 痼?아니다. (승려나 반승려들의 숙명적인 미신은 그랬었지만) 즉 올바른 곳은 육체, 태도, 몸조리, 생리학이며, 그 밖의 것은 거기에서 자연히 발생한다···이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역사상의 첫째가는 문화적 사건이다. 필요한 것은 그들이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실행했었다. 그리고 육체를 경멸한 기독교는 이제까지의 인류의 최대의 불행이었다.******* 취지를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서 <태백산맥>의 송경희가 김범우와의 정사를 치른 뒤, 그 생생한 감회를 늘어놓는 대목을 감상해 보자: 인간을 놓고 정신과 육체를 따로따로 떼서 말하려 하고, 특히 사랑을 말하면서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것은 얼마나 억지고 아둔인가···애초에 플라토닉러브라는 말을 만들어낸 자나 그것이 좋다고 떠들거나 깨끗한 척하는 것들은 모두 성불구자이거나 위선자들이다···사랑에서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것처럼 멍청한 짓은 없다. 그 현명하고 똑똑한 서양사람들이 어찌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 *가령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같은 이는 신에게 다가서는 열 단계 과정을 차례로 묘사하면서 여성이 그 애인을 그리워하고 찾는 모습과 자주 견주어 설명한다. St. John of the Cross, Dark Night of the Soul, trans. E. Allison Peers (Garden City, New York: Image Books, 1959), 19-20장. **조르쥬 바따이유, 에로티즘, 조한경 옮김 (민음사, 1989), 148쪽. ***같은 책, 253쪽. ****같은 책, 276쪽. *****F. 니체, 권력에의 의지, 강수남 옮김 (청하, 1997), 349쪽(#572). ******I.M. Lewis, Ecstatic Religion (New York: Penguine Books, 1971). *******F. 니체, 우상의 황혼: 철추로써 철학하는 길, 박준택 옮김(박영사, 1981), 125쪽. ********조정래, <태백산맥> 6권 (해냄, 1996), 322쪽. 초청칼럼니스트 김영민 jajaym@hanmail.net 한일대학교 철학과 부교수/저서 <지식인과 심층근대화>(1999)외 14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