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tide79.microsoft> 날 짜 (Date): 2000년 9월 8일 금요일 오전 07시 49분 56초 제 목(Title): 최형묵/서평 김진호, 예수로 예수를 넘기 � 서평> 김진호, [예수 역사학: 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하여](2000, 다산글방) 그리스도교 정체성의 재구성과 역사의 예수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 연구소 상임대표) 1. 만일 예수가 다시 온다면 오늘의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은 어떻게 될까? 이 물음에는 역사적 예수와 오늘의 그리스도교 또는 교회들과는 일정한 괴리가 있다는 비판적 의문이 깔려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2천년 전 팔레스틴에서 살았던 예수와 오늘의 그리스도교와 교회에서 가르치는 예수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곧잘 '예수는 좋지만,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싫다'는 말을 한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학계 안에서 역사적 예수와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예수의 차이에 대한 의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학문적 차원에서 그 물음은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적 사고로부터 비롯된다. 합리주의적 사고는 '교회만이 지식의 유일한 대리인'이라는 중세적 사유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그와 같은 사유를 공유한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물음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 방법론적으로 주로 문헌비평에 의존하였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18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예수전을 쏟아 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재건된 예수상은 실제 역사의 예수라기보다는 저자들의 당대적 이상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의 주장으로 역사적 예수에 관한 탐구는 사실상 파산선고를 당한다. 이후 문헌비평의 한계를 넘어 문헌형성 이전의 구술전승의 양식을 규명함으로써 역사적 예수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러한 시도는 예수의 생애를 전하는 복음서의 구술양식이 헬레니즘화된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산물이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오히려 역사적 예수의 복원 과제는 결정적 난관에 봉착한다. 이러한 난관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사회적 위기와 맞물려 신학의 중대한 위기로 받아들여졌다. 인간 사회의 악마성을 통감하게 한 역사적 위기 가운데서 뭔가 확실한 '신적 개입'을 필요로 하였지만, 신적 개입의 역사적 근거인 인간 예수는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는 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법론상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접근 불가가 곧 신앙과 신학의 위기일 수 없다는 인식의 전환 계기가 불트만(Rudolf Bultmann)을 통해 나타난다. 하이데거(M. Heidegger)의 영향으로 실존주의적 신학을 전개한 불트만은 실존적 깊이의 차원에서 신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였으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문헌상에 나타난 신화적 외피를 걷어냄으로써 오늘 우리와 예수는 실존적 차원에서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불트만의 이러한 시도는 어찌 보면 단순히 과거의 예수를 복원하는 데 그치고 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물음과는 달리 예수를 '오늘 여기'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오늘의 실천에 개입하는 신학적 인식의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실존주의 신학은 역사 내에 존재하는 인간의 문제를 유예시킴과 아울러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사실상 폐기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전후 세계 재건과정의 활기와 더불어 역사적 물음이 부활하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도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대개 이전에 비해 방법론상 별다른 진전은 없었고, 다만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자료로 예수의 '말'을 검증하기 위한 보다 엄밀한 기준이 제시되는 정도였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전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예수 르네상스'로 불리우는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의 본격화이다. 이와 같은 '예수 르네상스'의 배경에는 1970년대 이후 활발해진 학제적 연구의 성과가 자리잡고 있다. 신학 특히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라는 예수 역사학은 사회과학과 유대교와의 만남 그리고 같은 범주내에서 포괄될 수 있는 것이지만 문화인류학과 고고학, 비교종교학 등과의 만남을 통해 방법론적 진전을 이룩한다. 이 방법론상의 진전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의 초점 또한 변화시킨다. 이전에는 역사의 예수를 복원하는 데 가장 신빙성 있는 근거로 예수의 '말'을 규명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나, 이제 사회역사적 세계를 통해 예수를 조명하게 된 것이다. 사회역사적 세계를 통해 예수를 조명한다는 것은, 예수를 단순한 개체적 인격으로서보다는 주변의 맥락과 결합되어 있는 사회역사적 존재로 보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예수운동'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러한 인식과 관련된다. 그것은 예수 개인의 행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관계 안에서 예수와 민중이 더불어 일으킨 일련의 운동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성과는 학문이론적 차원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에서 이와 같은 성취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바로 제3세계의 민중운동 그리고 이와 더불어 전개된 새로운 신학운동 및 서구의 급진적 신학운동의 영향이다. 이러한 운동은 '오늘 여기'의 '갈등'의 문제를 '신학하기'의 전면에 내세우며 그것을 역사의 예수에 적용하도록 고무한다. 이렇게 해서 '오늘 여기'와 '그때 거기'를 통합하는 문제설정이 가능해졌다. 불트만이 실존적 차원에서 강조했던 이 양자의 만남이 오늘 새로운 신학적 인식에서는 역사의 차원에서 재현된 것이다. 2. 이 책 제1부에서 김진호는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의 이론사적 맥락을 꼼꼼히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김진호가 이론사적 궤적을 꼼꼼히 살핀 것은 그 최종적 성취를 그대로 답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추구되어 왔던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가 지닌 가능성과 문제점이 무엇인지 밝히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함이다. '예수 역사학'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데서부터 그 의도가 깃들어 있다. 그것은 현대 역사학의 인식을 수용하여 오늘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예수상을 찾으려는 의도이다. 그리고 그 의도의 진정한 동기는, 본래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 동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의 그리스도교 및 교회들이 가르치는 예수상을 해체하려는 것이다. 오늘 교회에서 선포되는 예수는 탈권력적 해방을 지향했던 예수와 달리 거꾸로 교회와 개인들의 권력과 욕망을 보장해 주는 후견인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 '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하여'는 바로 이러한 의도를 함축한다. 김진호는 카아(E. H. Carr)의 말을 따라,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이해한다. '시간의 대화 과정'에서 역사학의 정의를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학의 과제가 단순히 '객관적인' 과거의 복원에 있지 않고 현재의 실천으로부터 촉발된 문제의식과의 상관관계에서 '역사적 사실'을 이끌어내려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보면, 지금까지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 과정은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다. 예컨대 예수의 생애를 전하고 있는 복음서를 대하면서 '예수'(사실)와 '복음서'(해석)의 단절을 전제하고, 거기서 해석의 껍질을 벗겨낼 때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최근의 연구성과에 이르기까지 과연 어떤 것이 예수가 진짜로 한 '말'이냐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이 그 예이다. 지금까지 역사의 예수에 대한 연구 경향은 한결같이 복음서 텍스트가 예수와 저자와의 대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텍스트를 통해서만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려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시도는 역사가가 자기 시대의 문제의식을 배제한 채 객관적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믿음에 기초해 있다. 김진호는 현대 역사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바로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는데,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인식의 단초를 민중신학에서 발견한다. 민중신학의 선구자인 안병무는 복음서 텍스트를 예수와 전승자/저자 사이의 대화의 산물로 이해함으로써 예수의 역사성 논의를 해명하려고 한다. 그것은 특별히 '사건'의 해석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 사건은 예수와 민중이 일으킨 '원사건'에서 시작되어 이후의 전승자들과 전승의 기록자와 그 주변의 공동체로 계속 이어지는 계열화를 이루며, 오늘의 해석자 역시 그 사건의 전승 과정에 참여한다. 이처럼 '사건'은 시공간적 대화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재연된다. 민중신학이 '전태일 사건'을 또 하나의 '예수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김진호는, 역사 방법론상의 진전을 이루었으되 앞서 지적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최근의 역사의 예수 경향의 문제를 바로 이와 같이 현대의 역사학적 인식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민중신학의 사건론의 전망에서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한편, 최근의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와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전망의 결합은 민중신학이 지닌 한편의 약점 때문에도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예수 르네상스'로 불리우는 최근의 역사의 예수 연구경향이 해석자의 역사학적 상상력에 지나치게 의존할 뿐 예수 시대를 다루는 역사 방법론의 빈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민중신학의 한계를 보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양자의 이론적 성과를 결합하려는 김진호의 의도는 양자 모두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win-win 전략인 셈이다. 3. 이러한 전략하에 김진호는 제2부에서 말 그대로 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여기에서 그는 원 예수사건의 전개과정을 단계별로 재구성하여(탄생과 어린 시절, 갈릴리아 활동기, 기적 담론, 예수운동과 성 담론, 예루살렘 활동기<죽음/부활>) 그 역사성을 해명한다. 여기에서 일관된 관점은 당대의 민중운동과의 연계성 속에서 예수사건/예수운동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 연계성 속에서 파악된 예수운동에서, 김진호가 무엇보다 주목하고 있는 것은 예수사건/예수운동의 권력해체적 성격이다. 예수운동의 권력해체적 실천 지향성은 신학적으로 '하나님 나라 대망 신앙'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앙 이해는, 신앙을 신조와 동일시해 왔던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시각과 대립되며, 여기에서 그 신앙을 지켜 왔던 교회에 대한 두 가지의 새로운 이해를 낳는다. 하나는 교회가 예수사건의 유일한 담지자가 아니라 하나의 담지자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더 나아가 현존하는 교회가 예수사건의 담지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중심주의를 포기하는 것을 포함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청한다. 결국 이와 같은 문제설정은 그리스도교 정체성의 재구성의 문제로 귀결한다. 여기에서 만일 정체성의 혼돈을 피하고자 한다면 권력장치로서의 교회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예수사건과 교회와의 연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기성찰적 태도를 빗겨가는 셈이 된다. 이 점에서 민중신학의 사건론은 확실히 탈교회적 성격을 지닌다. 예수사건이 권력해체적 지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권력해체성이 정치경제적 실천만이 아니라 무의식적 지평과도 연관이 있는 담론적 실천 또한 포함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김진호가 평소 일관되게 주장해 온 '문화정치학적 실천'을 함축한다. 예수사건의 권력해체적 지향성을 이와 같이 이해할 때 예수가 민중과 더불어 일으킨 일련의 사건들이 지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예수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결정적 계기인 '성전정화 사건'은 정치경제적 의미 뿐만 아니라 유대교 전통의 맥락에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보다 많은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민중의 일상을 지배하는 성전 제의 메카니즘 자체를 문제시한 사건이었다.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는 예수의 행적 하나하나가 상징적인 의미 맥락과 관련이 있다. 예수사건의 전승자들은 바로 그것들을 통하여 예수가 민중들의 염원을 이룰 메시아로 확신케 하였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사건의 진정한 절정인 십자가에서의 죽음도 그와 같이 이해할 때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정치적 사건으로서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명백한 실패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가학적 권력의 악순환이 끝장난 것을 의미한다. 변혁의 성공이 승리의 환호성과 동시에 해방의 전통을 역사의 뒤안길로 묻어버리는 경우를 역사는 수없이 증언한다. 십자가 위에서의 신의 침묵과 죽음은 역설적으로 모든 죽임당한 자들과의 만남이며 죽임당함을 넘어서려는 전통과의 만남이다. 그 점에서 예수사건은 해방사건의 원사건이며, 동시에 죽임당함의 부활사건이다. 그 사건은 종착지를 거부하는 해방의 사건들로 오늘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다루는 데 이르러 김진호는 역사적 상상력에 더하여 문학적 상상력을 맘껏 발휘한다. 그 자신이 예수의 죽음을 예수사건의 절정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그가 이 책을 통해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여기에서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저자의 예수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값싼 상상력의 소산이 아님을 이어지는 제3부에서 보여 주고 있다. 예수운동의 배경사를 다루는 본격적인 논문 두 편으로 구성된 제3부는 앞 부분에서 다루고 있는 예수사건의 의의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신학자들은 대개 예수사건의 유일회성을 강조하고, 또 다른 민중운동들과의 관계를 말할 때조차도 예수운동의 차별화된 특징을 규명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김진호는 그 차별성을 규명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먼저 예수운동을 당대의 여러 민중운동과의 연계속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것은 예수운동이 어느날 갑자기 탁월한 한 지도자에 의해 연출된 것이라기보다는 민중들이 오랫동안 지켜 왔던 희망의 원리를 가시화한 전형으로 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형으로서 예수운동은 오늘의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재조명하게 하는 근거가 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오늘날 예수가 우리에게 유의미한 것은 교회로 현존하는 명시적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승리 때문이 아니라, 실패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된 예수 실천의 의의 때문"(258쪽)인 것이다. 4. 이 책은 시종일관 역사의 예수 탐구를 위한 이론사적 궤적을 규명하며 그것과의 비판적 대화를 끈질기게 추구한다. 심지어는 그가 이 책을 저술하는 동안에 읽은 두 권의 책에 대한 서평까지 보론으로 싣고 있어 그가 이 작업에 얼마나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준다. 이 점이 이 책의 '미덕'이자 동시에 '악덕'이다. 미덕이라 함은 탄탄한 논거의 제시로 이 책이 주장하는 바를 보편적 이론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을 충분히 제시해 준다는 것을 말한다. 지적한 대로 최근의 연구 동향에서 드러난 학제적 연구의 성과는 모든 분야에 마찬가지이겠지만 특별히 오늘 한국의 신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른 학문과의 관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양한 사유를 접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으로서의 교회와의 관계에서도 게토화된 언어로 외줄타기에 여념이 없는 신학이 과연 시대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 일 정도이니 말이다. 이 책은 이러한 현실에서 큰 자극제임에 틀림없다. 다음으로 악덕이라 함은 독자로 하여금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그것도 본격적인 연구 성과를 담은 책을 읽는 데 긴장감 없이 읽을 수 있으랴마는, 지나친 이론사적 궤적에 대한 검토는 정작 저자의 논지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것을 때때로 방해하기도 한다. 저자로서 입장의 일관성은 분명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한순간 방심으로 논지의 맥락을 잃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배려가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정작 저자 자신의 역사의 예수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대목(제2부)에서조차도 다른 연구 경향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어 왕성하게 전개되어야 할 '역사적 상상력'에 제한을 받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혹을 자아내기조차 한다. 그러나 이 '악덕'은 어쩌면 저자의 처지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성격을 지니지 않나 생각해보기도 한다. 개인적 취향 탓도 있을 터이지만, 이른바 '연구자'로서의 협소한 위치에서 비롯된 결과는 아닐지? 일찍이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방외인(方外人)의 신학', '방외 신학'을 말했다. 대학 캠퍼스를 떠나, 연구실, 연구비, 연구시간, 그리고 연구발표지(誌)가 있는 네모 반듯한 규격 있는 신학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펼친 자신의 신학을 그렇게 불렀다. 그래도 그분은 대학 캠퍼스에서 규격 있는 신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적이 있으며, 해직되어 있을 때에도 항상 '교수'라는 직함은 따라다녔다. 그러나 저자 김진호는 그런 기회를 누려 본 적이 없다. '학문의 권력'이라 해야 할지, 하여간 그런 것을 누려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인 그 흔한 박사학위도 없다. 그야말로 '방외인의 신학'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방외인의 신학이 설득력을 얻기에는 그 자체로 '권위'를 지니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지위나 명성으로 호응을 이끌어낼 수는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김진호의 탐구 열정은 그 과정 자체에 권위를 실어줄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그것을 알아주랴? 스스로 그 과정을 드러내놓고 알리는 길밖에! 수많은 연구서들을 읽어나가면서 스스로 추적해나간 이론사적 궤적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독백이 아님을 입증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 지난한 과정이 이 책을 읽기 까다롭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따분하고 메마른 책은 결코 아니다. 김진호의 이론적 탐구 과정에는 오늘 현실에서 비롯되는 실천적 문제의식과 열정이 깊게 배어 있다. 그래서 긴장만 늦추지 않고 읽어나가면 이 책은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적어도 오늘 그리스도교의 현실에서 의미있는 예수를 찾아나선다고 할 때 그만한 긴장감도 없어서야 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