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2000년 9월 4일 월요일 오전 01시 06분 34초 제 목(Title): [한백설교] 멜로드라마 오랜만에 설교 한 편을 올립니다. 최근 이 보드에서 있었던, '한국에서의 개신교 성장 이유' 논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이는군요. ------------------------ 2000년 9월 3일 한백의 소리 멜로드라마 김 진 호 때 : 통일염원 56년 칠백 일흔아홉번째 예배에서(2000.9.3) 본문 : 마르코복음서 8장 34절/ 곳 : 한백교회당 마르코복음서 8장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 [공동번역 성서] 그동안 잘도 은폐되어 있던 교회의 추문이 요즘 들어 갑자기 사회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이단 종파들로 분류되는 소종파 집단들의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 파동은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느 종말론파 교회는 방송국을 난입하는 사건을 연출하고야 말았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감행하는 무모하고 무지한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이른바 정통을 자랑하는 교파와 교회들에서도 그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한 교단과 그 산하 신학교에서는 우리 신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의 하나인 위대한 신학자 한 사람을 교수직에서 해임하고 목사직을 박탈했으며 나아가 교단에서 추방하는 중세기적인 야만적 행위가 자행됐습니다. 한국 굴지의 신학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거나 현재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쟁의 이유라는 것들이, 어처구니없게도, 학문이나 교육의 문제와는 무관한 몰상식적 관행이나 비리, 심지어 권력투쟁 따위였습니다. 게다가 학자들에게 연구와 발언의 자유를 억제하는 '특정한 문제에 관한 함구령'이 공공연히 가해지고 있는 게 한국 신학계의 현실입니다. 더욱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은 불상이나 단군상 등을 훼손시키는, 타종교에 대한 테러행위가 최근 들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력한 목사들이 교회/교단의 인사권을 독차지하려는 '추잡한 연줄망'주의나 자기 자손에게 좋은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직위를 이용하는 비정상적 가족주의를 조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들에게 자기 직위를 세습하고자 하는 전근대적 사태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 목사에 의한 교회의 재산 유용이나 여신도와의 성추문 등, 교회 지도자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에 관한 소문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직위를 놓지 않으려고 온갖 술수를 부리는 경우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천주교가 이백 년, 그리고 개신교는 이제 겨우 백 년이 조금 넘은, 타종교들에 비해 형편없이 짧은 선교의 역사에서 교회가 관여해온 추잡한 역사는 어떤가요? 선무당 사람잡는다는 속담처럼, 민족의 성찰적인 신앙과 신념 체계로 채 익지 못한 섣부른 종교가 한국의 근대사를 망쳐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식민지 시절엔 제국주의자들과 야합해 왔고, 건국 이후엔 민족 분단의 가장 전투적인 세력으로, 친일파와 손잡고 식민지 시대의 기득권 구조를 재구축하는 데 일조를 하였고, 공격적인 반공주의에 기초한 군부 파시스트 권력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온 댓가로 갖가지 비정상적인 제도적 특혜를 누려왔습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의 추잡성은 위에서 시사한 권력과 교회간의 표면적이고 노골화된 야합만이 아닙니다. 보다 심각한 것은 우리 역사의 파행성과 뗄 수 없이 결착된 교회의 존재 방식 자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병영적 강압성을 통해서만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이른바 '돌진적 산업화'는 한국적 근대화 과정의 파행성을 동반했습니다. 국가는 이런 파행성에도 불구하고 전국민을 산업화의 전선에 최대한으로 동원하기 위해 공격적 반공주의라는 극약을 썼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전쟁이라는 분노의 화약고에 불씨를 던져 넣는 위험한 장난을 벌어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의 국가의 반공주의적 규율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이 쓰라린 역사적 경험을 결코 성찰적으로 되뇌이지 못하게 해야만 합니다. 요컨대 이 분노의 정치가 한국 산업화의 밑거름이 되려면, 그 분노를 퍼부을 대상을 끊임없이 찾아내야만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족을 화해불가능한 대상으로 악마화하고, 체제 내의 비판자들을 '유사 악마'로 규정하여 배제와 테러를 가하는 장치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향해 잔혹극을 공개적으로 벌임으로써, 전 국민을 규율하고 국가의 발전전략에 총동원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한데 한국의 교회는 이러한 돌진적 산업화의 역사 속에서 두 가지 상반된, 하지만 실은 하나로 연계된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우선 교회는 바로 이 시기엔 '돌진적 선교'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개신교회는 이 시기 상상할 수 없는 속도의 폭발적인 성공을 이룩합니다. 그리하여 1990년초, 교인수로 본 세계의 대교회 50걸 가운데 한국 교회가 23개를 차지하고 있고, 1위를 포함해서 10위 안에 4개나 포함되어 있을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공을 '돌진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러한 광속도의 교세 확산 현상이 성찰성을 동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고/있을 거라고 여겨지는 타자를 악마적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을 자신들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교회적 신앙의 정체성'을 구성해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교인을 교세 확장 운동에 총동원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한국의 교인들은 수만 많은 게 아니라, 교회에 대한 헌신도에 있어서도 매우 높게 나타납니다. 놀랍게도 많은 집회의 수, 그리고 높은 교회 출석율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또 직장 신우회나 직종별 신도회 등, '교회밖의 교회'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편재한 현상도 그러한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한국 개신교회의 성공주의와 한국의 국가발전주의는 서로 병행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1990년대 한국의 돌진적 성장의 파행성이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이 사회의 여기저기로 삐쳐나오는 것처럼, 한국 교회도 그 추잡함을 더 이상 은폐할 수 없이 드러나고 있는 꼴인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한국 근대화의 파행성으로 인해 심각한 존재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효능 좋은 체루제요 환각제로서 자리잡아 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좌절의 체험, 집합적 상실감을 종교성으로 전이시키는 기제를 만드는 데 가장 성공을 거둔 게 교회, 특히 개신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성서 읽기에서 단적으로 엿보입니다. 성서는 '신의 영웅신화'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된 신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궁극적인 성공이라는 구성을 가진 성서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 신화'입니다. 즉 아버지의 질서의 정당성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한데 흥미롭게도 그것은 '신의 사랑'의 이야기로서 비유적으로 이해됩니다. 신은 남편이고, 인간은 아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가부장제적 가족모델에서 불륜의 아내를 용서하기 위해 온갖 역경을 헤치고 나옴으로써, 아내가 그 불륜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함축된 역사가 생략된 채 단지 사랑으로 가득한 영웅신화, 신의 로맨스로 성서를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멜로드라마의 정통적인 형식을 그대로 보여집니다. 이러한 성서관을 토대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나아가 정체성이 구성됩니다. 그것은 시대와 대결하는 비판의 역사가 희석된 신의 사랑어린 성공 이야기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입니다. 좌절의 사회적 체험 혹은 그러한 집단적인 위기의식이 이것에 의해 상쇄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의 시각에서 그러한 관계를 내면화합니다. 자기 동일화는 이런 관계를 전제함으로써만 형성되는 것입니다. 즉 신의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동일화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이 견딜만한 것이고, 현재의 고통이 받아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끝내는 사랑으로 가득한 남편인 신에 의해 다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신은 자기 외부의 권위의 상징으로, 아버지의 질서, 다수자의 관점으로 전이되어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신의 시각은 종종 국가로, 교회/목사의 시각과 동일화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이라는 멜로드라마는 국가와 교회의 성공신화를 정당화하는 종교적 기재였던 것입니다. 예수 시대 유다교 신앙도 성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다수자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고, 그 속에서 안주하면서 이면의 고통스런 현실을 감내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공은 '의'이며, 실패는 '불의'의 결과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의 불의 탓이며, 질병 걸린 자와 불구자도 그의 불의함의 댓가입니다. 신은 성공한 자의 시각에서 세상을 판단하며, 성공한 자의 머리에 축복의 주문을 외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축복은, 즉 성공은 신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이 배불리 먹는 나라며, 감옥에 갇힌 자가 자유를 얻는 나라며,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나라라고 말입니다. 그러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그 '의'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하는 이가 보상을 받고 행복해지는 나라라고 말입니다. 그 나라는 자기 명예를 위해 일하는 자, 부 위에 부를 얹고, 권력 위에 권력을 되쓰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 나라는 자기를 죽여야 참여할 수 있는 나라며, 그런 마음으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의 나라라고 말입니다. 결국 그 나라는 성공신화가 아니라 실패의 신화며,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멜로 뒤에 숨겨진 고통의 이야기를 들추어내는 말이 살아있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 --------------------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SCA!----http://www.hanbaik.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