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NU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무 자 유) 날 짜 (Date): 1996년07월20일(토) 03시03분34초 KDT 제 목(Title): [빛고을] 무등산 : 장황한 첫얘기 광주인의 기질은 무등과 닮았다고 한다. 높고 낮음이 없는 무등산은 어디서보나 어머니 품처럼 넉넉하고 푸짐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보라. 기기묘묘한 돌병풍이 둘러쳐있는 무등산은 광주인 그대로다. 광주인은 문화를 사랑하고 예술을 가꾸는 '부드러운' 사람들이지만 불의에는 분연히 일어선다. 그리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 내고장의 의미 찾기 (광주편) 에서 - 그렇다. 무등산은 광주에 있다. 산이 있어서 오르듯이 광주사람들은 무등이 있어서 오른다. 무등산은 광주인의 숨결이며 그 자체이다. 눈 뜨면 무등산을 바라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고 그 물이 적신 논밭을 갈아먹고 그 산 밑에서 쉬면서 대를 이어온 사람들이다. 광주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무등을 오르지 않은 사람은 없다. 12년의 학창시절 동안 24번의 소풍을 가면서 적어도 10번은 올라봤을 것이다. 친구끼리 가족끼 리 무상으로 오르던 산이다. 광주 전체를 아우르며 치솟아 있는 무등은 그 높이가 해발 1187 m 로 동서남 북 어디에서 보나 모나지 않고 둥그스럼한게 꼭 어머니의 어깨와 같은 산이 다. 무등산은 마한 백제시대에는 무돌,무당,무덤산이라 불렸고 통일신라 이후 무진악, 무악. 고려시대 때 서석산이라 불리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무등산이라고 하였다. 무등산에서 사람의 발자취는 고대적부터 발견된다. 충효동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은 이곳에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나타내준다. 그리고 백제시대에는 무등에 성을 쌓았는데 백성들은 그 덕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즐거워 하면서 '무등산가'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충 효동 성안마을을 거닐다 보면 인공으로 쌓았던 흔적이 있는 돌무더기를 발견 할 수 있는데 그건 대대로 성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통일 신라시대에는 많은 사찰이 세워졌으며 고려시대에는 영험이 있는 산이라 하여 국제(국제)가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광주 시내 중심지역에 정 사각형에 가까운 성이 둘러졌고 광주와 격리된 무등산은 쇠, 도자기, 종이 등 을 만드는 상공업자들의 생활무대가 됐다. 그 유적으로는 금곡동의 야철지, 충효동의 분청사기 가마터가 있으며 이곳에서 중앙관아에 납품되는 최고의 제 품을 만들었다. 무등산 산기슭에는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 규봉암 등 여러 사찰이 산재해 있고 절마다 천년의 세월고 더불어 숱한 전설과 소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 다. 이밖에도 국난이 있을 때마다 수많은 구국의 의병장들이 무등의 기슭에서 호국의 뜻을 닦고 그 뜻을 펼쳐왔다. 또한 환벽당과 식영정, 소쇄원과 같은 누정이 있어 가사 문학이 꽃핀 곳이기도 하고 의재 허백련이 창작활동을 하고 제자를 기르며 남화의 대가로 한 세계를 풍미하던 곳이기도 하다. 해마다 새해 첫날이면 무등이 먼저 깨어난다. 지난 한해의 액운을 떨치고 새 해를 희망차게 맞이하기 위한 발걸음이 줄을 잇기 때문이다. 광주시민의 발걸 음 그것은 새날을 꿈꾸는 광주인의 염원이다. * 기대해 주세요. 앞으로는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쓸께요 * ~~ ~~~ ~ ~~ ~~~ ~ ~~~~~~ ~ ~ ~~ ~~~ 사. 람. 들. 은. 자. 유. 롭. 다. ~~ ~~~ ~~~~~ ~~~~~~~~~~ ~~ ~~ ~~ ~ ~ 나. 만. 자. 유. 롭. 지. 못. 할.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