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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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U ] in KIDS
글 쓴 이(By): UYHYUL ("의혈사랑"�0)
날 짜 (Date): 1995년06월01일(목) 09시16분15초 KDT
제 목(Title): 죄수번호 2047, 양심수 '박광열'


우리 여섯은 만났다, 1983년 3월 어느날.

중학교 2학년 올라가는 반 배치를 끝내고 새로운 친구들과의 사귐을 시작 하던 그 
해의 어느 봄날에......

"신광식", 전남중학교를 다니던 첫 해, 나는 광주의 톨게이트에서 가까운 어느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 아파트에는 여느 아파트와 같이 종합상가라는 커다란 
밀집된 가게들이 한꺼번에 붙어 있는 그런 상가가 있었다. 그 종합상가에 가면 한 
문방구가 있었는데 거기엔 그 당시만 해도 크게 유행하지 않던 전자오락기가 딱 
2대 있었다. 하나는 '벽돌 부수는 탱크' 그리고 또 하나는 '가락시(Galaxy)'.

전자오락이란, 나에게 큰 흥미거리였다. 조그만穩璲� 앞에  앉아서 다른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어린 나에겐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 곳에 가면 
'죽돌이' 한 명이 있었는데, 나처럼 '가락시' 보다는 '탱크'에 더 재미를 느껴, 
항상 그곳에 가면 그 녀석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탱크를 하고 있었다.

그녀석이 끝나기만을 기다려 내가 '탱크'를 할 때 쯤이면 어느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고 내가 자리를 뜨면 ㅁ� 녀석은 기다렸다는듯 그 자리에 다시 앉곤 
했었다. 그 때가 1982년.

중2에 올라가서 반 배치를 끝내고 새로운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 보았다.
그 속에 '그 녀석'이 있었다. "신광식".



"고영제". 중학교 2학년이 되던 그 해는 프로야구가 출범 한지 얼마 안되던 
때였다. '스포츠 공화국'이라 불리던 5공 초창기,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들은 
'프로야구'의 출범에 신기함을 느꼈다. 당연히 우리는 "해태 타이거즈"의 광신자 
였다. "HAI TAI TIGERS"는 우리에게 하나의 '종교'였다.

수업이 끝나면 우리들은 운동장에 모였다. 모두들 야구 글러브와 뱃, 그리고 
공, 등을 날마다 챙기고 다니다 시피 해서 우리들은 거의 날마다 수업이 끝난 후, 
운동장에 모여 '프로야구'를 흉내 낸 어설픈 '배트'를 마구 휘둘러 대기 일쑤였다.

영제, 그녀석은 모두가 부러워 할만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3루수를 보는데, 
타자가 친 공이 3루측으로 굴러가는 순간엔 그건, 분명히 '아웃' 이었다. 빠르게 
굴러가는 그 볼을 기가 막히게 나꿔 채서 1루수를 보던 나에게 , 받고 나면 
손바닥이 얼얼함을 느낄 정도로 강하고 정확하게 공을 뿌려대곤 했었다.



"김정호". 나약한 이미지로 다른 우리들의 느낌과는 다르게 차분하고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소아리진'. 정호는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심장이 약해서 미국에 
건너가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 그런 친구였다. 점심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나서 
그 당시 어린이 영양제였던 '소아리진'을 꼭 한 알씩 먹곤 해서 별명이 
'소아리진'이었다.  정호는 우리모두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반에서 1등은 
물론이고 전체에서 3등 이내에서만 맴도는 , 시험만 보고 나면 이번엔 몇등 
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던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수학경시대회에 광식이랑, 나와 함께 나갔지만 오직 혼자서만이 입상을 하여 
질투심도 나게 했던, 그래서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아이. 하지만 우리들하고 놀때면 금방 숨이 넘어 갈 듯 헉헉 대면서도 재미있다고 
계속 끼어주라 하던 정호.



"안 혁", 혁이는 노래를 좋아 했고 잘 부르지는 못했지만 조용필의 '산유화'를 
목이 찢어져라 부르곤 했었다. 수업 시작 전 쉬는 시간이면 혁이는 항상 교단에 
서서 아무도 집중해 주지 않는 야속한 청중을 향해 올라가지 않는 고음에도 괴성을 
지르며 '산유화'를 부르기를 좋아 했었다.

우리가 중3이 되던 해 서울로 전학을 가서 우리를 무척이나 슬프게 했던 '혁'.
나중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들의 만남을 13년간 유지 하도록 하게 만든 장본인.
사춘기 소년 시절, 서울에서 혁이 보내온 편지를 같이 읽으며, 그 애가 일필로 
갈겨댄 어줍잖은 시도 우리에겐 크나큰 기쁨이었다. 키가 180을 넘는, 그래서 우리 
친구들  중 가장 큰 키를 갖고 있는 혁.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여린 마음을 갖고 
있기도 한 의리있는 친구.



"박광열". 중 2 시절, 우리는 일요일만 되면 광열이네 집에 모였다. 다들 비장한 
각오를 하고서. 주머니엔 각자 10원, 50원, 100원짜리 잔돈을 한 웅큼씩 준비를 
해서 '오늘 만큼은 기필코..' 하는 굳은 신념으로 광열이의 방에 여섯이서 둘러 
앉아 "두장 보기"를 시작했다. 배팅을 하지 않고 죽으면 10원, 걸면 20원. 혁이가 
'아동심리학'이라는 말을 흩뿌려 대며 우리들의 심리를 읽어 내려 무진 애를 
썼지만 광열이의 억겁보다도 더 깊은 그 속을 우린 아무도 헤아리지 못했었다. 
'분명, 저건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배팅을 하면 엄청난 카드로 우리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여 가운데 쌓인 10원짜리, 100원짜리 동전을 신나게 긁어 모으기 
일쑤였고 다음판에 광열이가 또 배팅을 하면 우린 무서워서 다 포기하고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맹탕'으로 우리를 완전히 갖고 놀던 그런 친구. 광열이.

두장보기를 잠시 멈추고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저녁 밥을 게걸게걸 다 먹고 나면, 
2차게임을 위해 잠시 여흥을 갖자며 'Guitar'를 옆구리에 익숙하게 끼워 넣던 
광열이, 광열이의 기타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지금도 가끔 기회가 되면 듣고 
싶어지는데, 그 당시만 해도 광열이가 기타를 치고 나머지 다섯이서 방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고함을 치듯 노래를 부르고 나면 세상이 내것 같고 너무나 재미있어 지곤 
했는데, 듣고 싶다, 광열이의 기타 연주 솜씨.

이러한 광열이가 나중에 소위 말하는 '전국민을 놀라게 한' 사건을 일으키리라곤 
우리들중 아무도 예견을 하지 못했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대학에 갔다. 서울에 떨어져서 혼자 지내던 '혁'에겐 우리의 
서울 유학이 너무나 반가웠으리라. 대학 다니던 시절, 2-3개월에 한 번씩 시간을 
내어 술도 마시고 방학이 되면 전국을 돌며 캠핑도 하고 그간 못다했던 우리들의 
우정을 다시금 확인하는 그런 순간들을 우리는 많이도 가졌었다.

 그러던 1991년 6월 3일, 우리는 엄청난 사건(언론에서 그토록 떠들어댄)에 
부딪히게 되었다.

  "한국 외국어대학교 학생들, 정원식 국무총리 계란, 밀가루 세섭�"

당시, '강경대 학우치사 사건', '박승희 학우 분신 사건', 그 후로 수많은 학우들의 
연이은 분신사건, 결국에는 성균관대 '김귀정'학우의 진압도중 압사사건까지, 
학생운동은 엄청난 수난을 겪으면서 정부에 대해 각성, 그리고 퇴진을 요구 하며, 
당시 국무총리이던 '정원식'을 포함한 내각의 총사퇴를 야당과 함께 재야의 힘까지 
합쳐 결사항전을 하며 요구하던 시기였다. 

그런 학생운동으로서는 공세국면이던 와중에 '외대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신문, 
방송, 각종 잡지등 모든 언론들은 학생들의 '계란과 밀가루를 뿌린' 그 행위에 
대해 집중적인 난타를 해댔고, 이에 뒤질세라 정부측은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반격을 시작했다. 다시금 학생운동과 재야의 힘은 약해져 갔고 
수세국면에 몰리게 되었었다.


1991년 6월 3일 오후, 나는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양어대 
학생회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광열이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나의 '설마..'하는 생각을 단번에 뒤집어 버린건 상대방 학생에게서 들은 정말 
듣고 싶지 않은 한마디 말이었다.

  "학생회장님,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요. "

그 날 오후 당장 수배령은 내려졌고 외대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단과대학의 모든 
학생회장과 그에 가담했던 학생들은 그 일이 있은 이후 피신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양어대 단과대학 학생회장을 하던 광열이는 이미 어디로 사라졌는지 
동료들도 모른다는것이다. 설사 안다고 해도 그 전화에 대고 얘기를 할리가 
만무했다. 도청을 당할것이 뻔했으니.....

다음 날 아침, 한겨레신문엔 전날 외대사건의 일로 인한 수배자 명단이 올라 
있었다. 담담한 마음으로 그 명단을 읽어 나가던 중 나는 이미 예감을 했으면서도 
새삼스러운 놀라움으로 한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양어대 학생회장 박광열"

허탈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동시에 어린 시절 부터 함께 해왔던 그 시절의 그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순식간에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중앙대를 다니던 
나는 학교의 친구들과 선배들이 수배속에 있을때도 그처럼 힘이 빠지지는 
않았었다.오히려 더욱 오기를 갖고 싸워나가던 나였다. 그런... 광열이의 수배령은 
나에게 엄청난 패배감을 안겨 주었다. 엄청난 패배감을.......

광열이의 수배령이 떨어지고 우리다섯은 모였다. 도대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외대에 연락을 해봤자 결과는 뻔할거고, 지금 어디 있는지 
생사도 파악 할 수가 업고, 답답하기만 했다.

 "아따, 그래 데모는 뭐할라고 해서 이리도 사람 속을 썩인다냐, 광열이 그 놈 
말이여...좋게 공부나 할 것이지 말이여....젠장할..."

광식이는 무작정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말했고 우리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른 
상황에서 어떤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당장 나서서 대꾸를 했겠지만 나에게, 아니 
우리에겐 아무도 그럴 의지도 기력도 없었다. 경희대 정경대 학생회장을 하고 있던 
'영제'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 너무 힘 빠져 하지 말장께. 내가 한번 알아 볼팅께 그리 걱정 말고 또 
설사 잡힌다해도 어쩔것이냐, 재판 받고 풀려나도록 집행유예라도 받게 해야 할 것 
아니냐, 내가 한 번 수소문 해 볼팅께 우리 너무 실망만 하지 말더라고.. "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내 가까운 죽마고우중 한 친구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었다. 너무 이런 쪽에 무관심 했던것 같애..광열에게 
미안한 생각만 드는구나..."

그 당시 정호는 사법고시 준비중이었다. 우리모두는 광열이의 그런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도 정호의 사법고시 준비에도 신경을 써주었다.

  "정호 너는 걱정하지 말고 너 공부나 열심히 해, 사법고시 패스해서 검사가 된 
다음에 나중에 이런 일 다시 생기면 잘 생각해서 영장 발부 해, 무조건 위에서 
시킨다고 무턱대고 사전구속영장 발부 하지 말고 말이여.."

혁이는 그 와중에도 우리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별 우스운 소리를 계속 해댔지만 
우리들은 다들, 가슴 속에 떠오르는 광열이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약 한달이 지난 어느날 오후, 그 날은 비가 엄청나게 오고 있었다. 
하루내내 쏟아지는 빗줄기에 도서관 갈 생각도 안하고 그저 집에 쳐박혀서 뒹굴던 
참이었다. 그 날 저녁, 가까운데 사는 후배 한녀석이 기분도 그런데 우리 
양념치킨이나 뜯읍시다 하며 나의 집으로 멕시칸 양년치킨을 한마리 사왔다. 
기분도 울적하고 광열이의 생각도 점점 엷어져 가던 그런 날의 저녁이었다.

막, 양념치킨을 입에물고 한 입 뜯을려는 찰나,  " 따르르르르릉 ~~~~ "

  "여보세요?"

  "........."

  " 여보세요?, 누구세요? "

  "........."

 순간 나는 직감했다.

  "광열이지? 너지?"

  "......."

  "야, 광열아 나 대원인데, 거기 어디냐, 응? "

  " 하하, 대한민국이다 "

이런! 나의 애타는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그녀석 광열이는 쾌활한 웃음으로 나를 
달래듯 이야기를 계속 해나갔다.

  "야, 이 전화는 도청 당할 염려 없으니 얘기 해라 거기 어디야? 궁금해 죽겠단 
말야.다른 친구들도 다 너 소식만 기다리고... "

  "도청 당하는지 안당하는지 네가 어떻게 아냐?  하하하 "

  "이놈아, 장난 치지 말고 어디야? 서울이야? 내가 지금 나갈께 거기 어디야?응?"

  "중앙대 중앙도서관 앞.....  딸깍...뚜뚜뚜뚜뚜..........."

  " 뭐? 우리학교? 야! 광열아, 광열아!! "

난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서 차분히 치킨을 뜯을 수가 없었다. 같이 이해를 
잘해주는 후배에게 모든 이야기를 하고 달래서 보내고는 미안한 마음에 치킨도 
남은것 가져가서 친구들하고 먹으라고 했다. 근데 그 후배 하는말..

  "형, 수배떨어진 그형, 밥도 제대로 못먹고 다닐텐데 이걸로 오랜만에 몸보신좀 
해줘요. 몸보신이 될지는 모르지만요.."

짜식, 너무나 고마웠다. 하지만 그 때 내겐, 더 이상 그 후배녀석과 이야기를 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밖에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간혹 천둥 번개가 내려쳐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있었다. 나는 대충 츄리닝에 슬리퍼를 신고 우산을 한개 더 챙긴 다음 
집을 나섰다.학생회관으로 통하는 개구멍을 미끄러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간 다음 
중앙도서관 모퉁이를 돌았다. 비가 많이 오는 동안에도 도서관의 불은 꺼지지 
않았었고 그 안에서 공부하던 학우들이 간혹 나와선 현관에 서서 담배를 피며 
잡담을 나누는 그런 모습들이 보였다. 나는 눈을 휘휘 둘러 광열이의 비슷한 
모습이라도 찾으려고 애를 썼다. 본관쪽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멀리에서 오토바이 
한대를 세워놓고 비를 피하며 담배를 태우고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익숙한 
몸놀림...광열이였다.



 "비 많이 맞았지? 자, 닦어라 "

나는 수건을 내밀며 좀 앉으라고 광열이에게 권했다. 

  "짜아식, 계집애 처럼 방 꾸며 놓는 버릇은 여전하구만.."

  "얌마, 이게 얼마만이냐? 네가 전에 우리집에 들른이후로 거의 반년만이다. 
상황은 엄청나게 다르지만....근데, 너..."

  "야, 헐크! 배고픈데 밥 없냐? "

  "짜아식, 반가운 소리만 골라서 하네, 닭고기 뜯을래? 아님 밥 먹을래? "

  " 둘 다 "

광열이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애써 힘없는 모습 보여주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나를 속일순 없었다.

  " 웬 오토바이냐? "

  "이 신세에 어떻게 차를 타고 다니겠냐? 가는 곳 마다 불심검문인데.."

  "그래 오토바이는 괜찮데냐? "

  "그래 임마, 여러번 당해봤는데 오토바이는 그냥 통과 시키더라구, 하하"

  "그래, 그동안 어디 있었어? 밥은 잘 먹었냐? 부모님하고 전화통화라도 했냐? 
도대체 어떻게 한것이길래 네 이름이 무슨 국가 전복기도 집단의 수괴처럼 신문에 
나온다냐? 엉?"

  "야야, 한가지씩 물어봐, 그러지 않아도 지금 그동안 대화를 못해서 얘기하는 
방법도 다 까먹었는데 그렇게 속사포로 물어보면 어떻게 하냐? "

  "얌마, 여유 있는척 하지 말고 빨랑 불어"

  "하하, 너 취조관이라고 된것 같다? 그래 불지, 사실은 내가 밀가루하고 달걀 
가져와서 애들한테 나누어주고 달걀은 다른 애들이 던지고 나랑 내후배랑은 계속 
밀가루만 뿌려댔지 뭐, 하하, 재밌더라야, 그거 우리 M.T.갔을때 요리 해먹고 남은 
것들이었는데....하하하"

우린 밤새도록 얘기를 했다. 마음 같아선 다른 네명의 아이들도 야밤 중에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광열이의 보안상 많은 사람이 모이는건 안좋을것 같았다.다른 
애들도 이해해 주리라 믿으면서......

다음 날, 하루내내 광열이는 오토바이는 내 집앞에 세워 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오후 늦게 돌아 와서는 급히 짐을 꾸렸다. 상황이 안좋아 졌다며 빨리 서울을 떠야 
한다고 하면서 하루만이라도 더 머물면서 친구들 불러서 술이라도 한 잔 하자던 
나의 부탁을 무참히 거절 하면서 광열은 중앙대 후문을 통해 상도동을 보기 좋게 
통과한후 이화약국 앞에 나를 내려 놓은 후 광열은 나를 쳐다 보았다.

  "짜아식, 나중에 면회 와라 "




그 다음날 아침, 한겨레신문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 전대협 김종식의장등 핵심간부 6명 검거 "






그로부터 거의 또 한달이 지난 후 방학이 되어 대학친구들과 함께 캠핑을 가던 중 
서울을 벗어나는 톨게이트에서 고속버스에서 나는 뉴스를 듣게 되었다.

어제 오후 전북 임실군 어느 곳에서 외대 정원식 국무총리 계란 밀가루 세레의 
중심 임물중 하나인 '박광열'군이 검거 되었습니다......박군은......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그 후 나의 �2박3일간의 캠핑은 죄책감과 패배감속에 어떻게 지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나의 친구들은 각자 제 갈길을 가고 있다.

평범한 회사원, 연구소 연구원, 사법고시 패스 후 법무관 생활중인 친구, 아직 
방위인 친구, 대학 4학년인 친구, 그리고 나.

이틀이 지나면 꼭 4년전 오늘이 된다.

정원식. 그사람은 지금 또 서울시장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광열이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그의 얼굴을 TV와 다른 언론 매체들을 통해 예의 주시하고 
있을것이다.

내일은 광열이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전화라도 한통씩 해야겠다.




덧붙임: 구속된 후 광열이는 3년 6월의 징역을, 실형으로 선고 받고 복역 도중, 
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 취임시 특별사면을 통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 "의혈"의 이름으로..... ******* 김 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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