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7년07월11일(금) 14시46분05초 KDT 제 목(Title): 부처의 움직임 불소행(佛所行) 부처님의 뜻은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어떤 시점에 "나는 깨달았다"고 하는 깨달 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에 "나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는데 지 금 있는 것으로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없는 것이었지만 어떤 시점에 있는 것으로 깨닫는 것이면 이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만든 것입니다. 본래 있었고 본래 알고 있던 것들이기에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항상합니다. 무한한 과거 이전부터 현재를 거쳐서 영원한 미래에 까지 깨달음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다른 말로 하면 "진리(참된 이치)"라고 합니다. 참되다는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거짓은 생겼다가 없어지면 거짓입니다. 우리의 몸뚱아리는 생겼다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몸뚱아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몸뚱아리를 "참됨"으로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입 니다. 그러나 몸뚱아리는 또한 몸뚱아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되다는 것은 공간적인 한계 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간적인 한계성이 없다는 것은 몸뚱아리에는 없는 진리라고 하면 그것은 진리 아님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뚱아리 이 자체에 의 미를 두고 추구하는 것도 "외도"이며 그렇다고 몸뚱아리는 진리의 현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외도"입니다. 외도는 불교외의 다른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외형은 기독교가 되었든지 명상이나 기공이 되었던지 외도가 아닐 수도 있으며, 또는 불교라 해도 외도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뚱아리를 어떻게 해서 진 리를 알 수 있다고 하는 말도 외도의 말이며, 몸뚱아리를 접어두고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하 는 것도 외도의 말입니다. 진리는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 없어야 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일대사 인연(모든 고통을 해결하겠다는 서원의 인연)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몸을 받아서 나투신 것은 바로 이 진리가 시간과 공간적인 제약 속에 있지 않음을 말하여, 진리를 외면하고 있으면서 또 다른 진리를 갈구하여 스스로 고통 속에 빠지고 있는 뭇생명 들에게 안심과 완전한 자유의 기쁨과 완전한 평화로움과 완전한 평등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진리를 또 다르게 말하는 것으로 "절대진리(絶對眞理) : 상대가 끊어진 진리"라고 합니다. 진 리 앞에 붙어있는 이 절대(상대가 끊어짐)라는 말은 진리의 특성을 아주 잘 표현하는 말입 니다. 절대란 상대가 끊어졌다는 말로 상대를 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절대진리의 특성은 "너와 나", "주관과 객관","시간과 공간","중생과 부처","인간과 신","피조물과 창조자"라는 대 립이 끊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즉 진리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 "공간적 한계 없이 적용", "시간적인 구분없이 적용", "상대가 끊어져 있음" 입니다. 우리는 진리라는 이 단어의 의미만 잊지 않 고 있어도 어떤 것이 참된 이치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담보 로 하고 미지의 진리로 향하게 하는 말들은 사실은 진리에서 더욱 멀어지게 할 수 밖에 없 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없는 곳이 없고, 이미 대립이 끊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어 느 곳에 따로 있다는 쪽으로 사람을 몰고가고 이미 대립이 끊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으로 하여금 진리라는 대상과 언제나 대립상태에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없는 곳이 없습니다. 아침에 지저기는 새소리에도 진리가 있고 연구원의 화단에 피 어있는 꽃속에도 진리는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진리입니다. 우리의 한 생각속에도 진리는 있 고 우리의 몸속에도 진리는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새소리에서 알 수도 있고 잔잔하게 불 어오는 시원한 바람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거센 풍랑으로 몰아치는 태풍속에서도 진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진리보다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에서 아는 진리가 더욱 값집니다. 바깥세계에서 아는 진리나 우리의 마음과 몸에서 아는 진리의 차이 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마음과 몸의 이 찰나적 순간에서 동 작되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새롭게 탄생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특성이 이렇게 공간적,시간적 제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과 몸은 제약상태 속에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 진리 자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속에 있을 때가 많고, 해야할 일이 있을 때에 자꾸 망설이게 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마음이 빼앗기고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거리도 많습 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즉 진리로 향하는 마음이 나오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걱 정거리는 생겼다가 없어지고 번뇌망상도 역시 생겼다가 없어지는데 그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에 우리의 삶을 의탁하고 사는 것으로는 몸과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평화로운 삶이 기 약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란 곧 진리를 말하는 것이고 진리란 무너지지 않는 이치이고 모든 현상을 만들고 있는 현상의 근원지입니다. 그 진리가 모든 고통을 다 소멸시키겠다는 인연을 말미암아서 석가족의 싯달타라는 태자의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싯달타 태자는 자신의 생.노.병.사라는 인간의 삶이 모두 진리의 화현임을 입증하고 그것을 드러냈습니다. 싯달타 태자는 진리를 깨우친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진리가 인간의 모습으로 완전성을 드러낸 진리 자체임을 드러나는 것이 부처님 일대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석가족의 성 자인 석가모니를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모습은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만이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모습으로 나오기 전에도 인간의 모습이고 인간의 모습을 거두어도 인간의 모습입니다. 나온 것(생)만 모습이 아니고 없어진 것(멸)도 역시 모습입니다. 그 생멸하는 모습 자체에 진리가 완전하게 동작되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을 우리는 "법"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났다가 죽은 인간이라 면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부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육신이라는 어떤 틀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진리 자체이므로 그 분의 영역은 공간적인 제약이 없고 시간적인 틈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 분의 영역은 우리의 마음과도 어떤 경계를 가지고 있지가 않습니다. 부처님의 입을 통하여 세상에 언어로 표현되기 시작한 "법"에 의지하여 우리들은 너무나도 쉽게 석가모니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이면서 마찬가지로 우리의 참다움인 진리와 만날 수가 있습니다. "상대가 없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생한 법음을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속에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음은 하늘을 나는 새소리를 통하여 우리 에게 들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음은 이웃의 벗을 통하여 들리기도 합니 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음은 우리의 한 생각속에서 들리기도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 음은 우리의 몸을 통하여 들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영역과 시간의 제약이 없기 때 문에 항상 어디에서는 들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석가모니라는 인간의 형상속에서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한 법에 의하여 우리는 새로운 진리의 자식으로 탄 생을 합니다. 그렇게 진리의 자식으로 태어나기에 불교도를 부처님의 입을 통하여 태어난 생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육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육신이 멸한 이후까지)를 통하여 진리가 어떻게 움직여서 고통에 휘말린 중생들에게 법음을 내게 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진리를 깨치기 보다는 진리가 아닌 쪽으로 가는 우리의 삶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진리는 어디에나 있지만 진리가 아닌 쪽으로 가는 우리의 마음으로 인하여 진리 와 무척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무척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 낌은 끝내 과거의 고통을 현재로 가지고 오고 현재의 고통을 미래로 가지고 가거나 혹은 미 래의 고통을 준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란 또 다시 말하면, 무너지지 않는 시공의 제약이 없는 깨달음이고 이것은 곧 진리 입니다. 석가모니불이란 진리가 석가족의 성자라는 모습을 통하여 생.노.병.사의 현상이 진리 의 드러남임을 완전하게 입증하셨기 때문에 석가모니불입니다. 부처님의 일대기는 부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움직여 나가던 그 진리의 동작을 말하는 것입 니다. 진리가 있는바 그 진리의 움직임이 구체화된 모습, 그래서 불소행(佛所行)입니다. 이렇 게 진리가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보살(菩薩)이라고 합니다. 진리가 움직이는 것에는 모습을 가지고 움직이기도 하고 모습을 가지지 않으면서 움직이기도 합니 다. 그리고 그 모습은 무한히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모습이 없는 소리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진리가 동작해야 하는 그 상황과 진리를 원하는 입장이 있다면 진리는 그 상황과 입장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나서 우리들의 고통을 해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장에서는 진리는 우리와 관계없는 또 다른 세계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없는 곳 이 없고, 상대가 끊어진 진리의 입장에서는 우리와 남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 리가 어렵고 고통스러움에 처해 있을 때에 진리는 우리와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수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고통속에 함께 하면서 동작을 일으키고 우리를 진리쪽으로 향하게끔 하 려는 시도를 합니다. 진리는 진리의 특성이 "절대"이기에 이는 곧 다르게 말하면 "관세음(觀世音:세상의 소리와 하나)"입 니다. 세상의 어떤 소리와도 따로 있지 못하는 특성으로 진리는 현존합니다. 그와 같은 특성 이 끝없이 동작함을 일러서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 든 소리와 함께 합니다. 고통에 빠진 신음소리에 관세음은 응답하고 진리를 목마르게 찾는 외침에 또한 관세음보살은 함께 합니다. 그러나 관세음의 진신은 특별한 모습과 특별한 소 리라는 형체속에 있지가 않습니다. 특별한 모습과 특별한 소리가 없기에 모든 고통의 모습 과 고통의 신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모습으로 관세음보살을 보았거나 어떤 특별한 소리를 통하여 관세음을 들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특성에 따른 자신의 관세음이 지 관세음이 아닙니다. 세상의 소리와 하나라는 관세음은 세상소리에 응답을 하면서 또한 세상소리로부터 끝없이 태어나고 변천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소리와 하나이고 세상의 소리가 무한히 변화함에 따라서 역시 관세음은 그렇게 무한한 변화 속에서 세상소리와 하나입니다. 관세음이 동작하고 있는 진리의 모습을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과 우리의 주변에서 한 곳 도 빼지 않고 적용하는 삶을 말해서 관음신앙이라고 합니다. 즉 관음신앙은 자신의 모든 것 이 관세음이라는 절대진리와 함께함을 믿고, 관세음이라는 절대진리로 자신이 살고 있음을 믿으면서 관세음으로 살아나가는 진리에 바탕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관세음신앙을 하는 분들은 자연스럽게 관세음보살을 입으로도 부르고 생각으로도 부르고 몸으로도 부르면서 자 신이 온전히 관세음과 함께 하고 있는 가운데에 해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관세음이 란 절대진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음신앙하는 분들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들 이 있을 때에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지혜와 감로수의 달콤한 자비를 함께 이용하여 관음의 세계를 일깨워 줍니다. 이 관음신앙은 우리 민족의 인연에 매우 깊숙한 자리를 형성하고 있 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진리의 또 다른 동작은 진리를 외면하고 있는 사람에게 진리쪽으로 향하도록 끝없이 시도하 는 "지장(地藏) 보살"입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한명의 고통받는 중생이 남아있는 한에 있 어서 그 중생이 성불할 때 까지는 절대로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는 진리의 동작입니다. 왜냐 하면 그 한명의 중생이라도 남아있는 한에 있어서 진리는 진리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 옥이란 곧 땅이 갇혀있는 곳입니다. 땅이란 우리 생명이 잉태되고 번창하고 활동하게 되는 근본적인 토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우리 삶의 원천인 땅과 단절되어 있는 헛된 상태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생명의 모습이 나오고 생명의 창조 원천이 곧 땅입 니다. 그와같은 땅을 외면하고 자신의 주변과 단절된 상태로 헛된 하늘에 마음이 빼앗길 때 에 거기에서 발생되는 현상적 괴로움의 세계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지장이란 곧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몸, 마음과 우리의 현재 삶과 함께하는 모든 것들인 땅(상징의 의미)에 무한 한 진리의 보배와 서광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발 밑인 땅을 외면 하고 미지의 하늘로 마음이 향하고 있을 때에 지옥이 발생하게 되고 그렇게 발생하는 지옥 살이에 진리는 우리와 동떨어져 있지를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진리쪽으로 돌아오도록 끝 없이 작용을 합니다. 우리토양으로 몸과 마음을 돌리고 그 토양 자체가 곧 "절대진리"가 그 대로 현존함을 믿고, 괴로움이라는 스스로 장막을 친 허상의 지옥살이를 여지없이 단절시키 는 진리에 바탕한 삶을 일러서 지장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장신앙하는 분들은 시와 장소에 관계없이, 입으로 지장보살, 생각으로 지장보살, 몸으로 지장보살을 하면서 자신의 삶이 지장이라는 이 삶의 지향성속에서 해탈의 삶을 살면서 또한 지장이라는 진리로부터 바 탕하는 삶이기에 그대로 지장보살로 도탄에 빠진 지옥살이 하는 분들에게 지장의 참다움을 일깨워 주게 됩니다. 다시 보살이라는 용어로 돌아가 봅니다. 보살은 진리가 역동화 되는 것을 이르는 말로 그 의미가 불소행입니다. 그런데 진리는 없는 곳이 없고 역동화되지 않는 곳이 따로 있지가 않 기 때문에 실지로 우리의 삶 이 자체를 이르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단지 우리의 현재 삶의 상태가 진리를 외면하고 있다는 모습이기에 아무나 보살이라고 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 다. 그런데 진리가 그 품성을 드러내고 있는 역동의 현장을 보살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깨달음이 역동화되고 있는 것을 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라는 말을 의미로 옮기면, 깨달음으로 부터의 개별적인 움직임의 삶(覺有情)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그리고 깨달음에 바탕을 둔다는 것은 깨달음과 진리의 항상한 성품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은 중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으로부터 일상의 생활이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불교를 믿는 사람을 불가에서는 보살이라고 합니다. 이 보살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뜻이 와전되어서 엉뚱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점 보는 사람이 스스로를 보살이라고 하고 있으며, 절에서 일보는 여자를 엉뚱하게 보살이 라고 하고, 여자 불자를 보살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광의적인 진리 측면으로 보면 보살 이라는 용어를 어디에다 붙여도 아무런 흠집은 없습니다만 뜻이 변질되어 본래 의미가 사라 진다면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흔히 절에서 남자신도를 지칭하는 거사(居士)라는 용어는 있는 곳 마다 진리성으로부터 있 는 보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거사의 의미도 참으로 소중한 진리표현입니다. 소승불교의 최고 경지인 아라한은 "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법이 없다는 것은 진리와 자신 이 한몸이 되었다는 경지로 이를 소승불교에서는 최고의 이상적 인간으로 상정되어 있습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에서 보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냥 소승불교와 구 분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아라한이라는 소승불교의 인격적인 경지가 진리성인 보편함과 두루 함과 상대 없음을 훼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누구는 진리와 한 몸인 아라한인데 누구는 진리와 한몸이 아닌 것이 되어서 자연적으로 진리를 가두어 버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 므로 대승불교에서는 불교의 근본적 진리관에 입각하여 아라한이라는 계급적 인간관을 파괴 하여 버렸습니다. 진리가 끝없이 자유롭게 드러나고 있는 만생명의 가치를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