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7년06월24일(화) 10시25분40초 KDT 제 목(Title): [RE] 문사수님께 질문.. 인간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바른 진리 듣기가 어렵다는 것이 불교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인간이야말로 그 어떤 세계보다 성불(하나님의 이치 자체와 하나였음)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불교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만큼 어렵다고 하냐면 눈먼 거북이가 바닷속에 있다가 천년에 한번 바다위로 올라오는데 그 때 마침 바다위에 구멍뚤린 판자때기가 흘러가고 있었는데 거북이 머리가 판자때기의 구멍에 들어가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인간을 불교에서 아무런 권력이 없는 존재로 상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추측해보시면 아시리라 봅니다. 불가의 계율은 모두 자연스러움이지 억지나 천당에 가기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치를 확인하였기에 그 이치에서 나오는 삶의 모습과 원칙이 계율입니다. 그리고 계율이 앞서서 이치가 흐려질 때에는 계율을 파괴하는 것이 불가의 계율 정신입니다. 불살생계라는 것은 물론 말 그대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와같은 생활원칙이 어디에서 부터 나오는지가 계율 자체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기독교의 용어들을 사용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였고 인간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에 "나"는 포함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나를 창조한 분 = 하나님 이와같은 등식이 성립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는 가정상의 연역법을 사용하지 말고, 나를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귀납적인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이대로 육체와 정신을 말합니다. 지금 이대로의 육체와 정신이 "나"인데 이 "나"를 지탱시켜주는 것이 지금의 나를 창조해주는 힘일 것입니다. 정신까지 따지면 매우 복잡해지니까 육체만 따져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나의 육체를 지탱시켜주고 오늘 육체가 어제 육체와 다른 육체로 창조시켜주고 있는 힘을 연필로 종이에 적어봅니다. 시작하면 끝도 없이 적을 수 있겠습니다만, 가장 간단하게는 곡물과 야채와 고기이겠습니다. 그리고 농부가 있을 것이고 도살장의 백정이 또한 지금 나의 육체를 창조시키고 있습니다. 나를 창조한 분 = 곡물.야채.고기 = 농부, 백정 = 하나님 곡물도 하나님이고 고기도 하나님이고 농부도 하나님이고 백정도 하나님인데 이것이 확장되면 마른 똥 막대기도 하나님이고 삼서근도 하나님이고 온통 지금의 나를 창조하고 있는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회교도도 하나님이고 흰두교인도 하나님이고 불교도도 하나님이고 하나님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삶을 사는 입장인 "개아"로 돌아와 보면 고기를 먹는 것이 하나님을 먹는 것이고 곡물을 먹는 것도 하나님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몸뚱아리의 향락과 몸뚱아리의 치장을 위한 먹을 것에 대한 자제가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몸뚱아리는 진리가 드러나고 있는 현장이나 몸뚱아리를 단지 몸뚱아리로 인정할 때에는 몸뚱아리 하나를 위한 욕망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에 대한 절제와 조화로움을 이야기되는 것이 자연스러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먼저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살자"는 계율의 자연스러운 이치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살아있는 생명을 눈앞에서 죽일 때에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죽이는게 일이되어 버린 습관적인 사람외에는 없습니다. 지나가다 발 밑에서 송충이가 발에 밟혀서 송충이 몸이 터질 때 조차도 안스러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럼 마음에 생명을 죽인 것에 대한 껄끄러움이 남는데 그것은 만생명의 도움으로 인간의 몸을 유지하게 되는 본래 이치가 우리의 특성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지말라고 하지를 않고 자신이 살아있는 생명을 직접 죽여서 먹지말라고 할 뿐입니다. 출가자가 고기를 먹지 않는 불교문화는 원래의 불교문화가 아니라 중국의 도교문화와 혼합된 가운데에 그 나름대로의 생명원칙을 세우는 가운데에 나온 것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불가에서는 전통적으로 "백정"을 성인대접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명을 죽임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삶의 양식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도 나이가 많은 전통적인 백정들은 자신을 천한직업이 아닌 성직에 종사하는 것으로 아는 분들도 있습니다. 즉 경제행위로서의 직업이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바탕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분들은 소를 잡기전에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을 합니다. 그리고 소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딱 한방"으로 소를 죽입니다. 이것이 한국의 전통적인 백정입니다. 도살장에들 한번들 가보십시요. 소나 돼지가 자기들 죽는 것을 다 알고 도살장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네발로 뻐팅기면서 몸부림 치다가 끝내 포기하고 흘리는 눈물들을 직접들 보십시요. 모든 생명의 특성은 "영생"하고 싶은 것입니다. 미물 조차도 자신의 생명을 한 없이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뻐팅기는 소나 돼지를 서양화된 경제적 직업논리에 오염된 백정아닌 도살자들은 힘과 기계로서 원망심을 남긴 채 도살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소나 돼지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염불"을 하는 백정앞의 소는 자신의 죽음을 순리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이 예전 백정(성직)님들의 말들입니다. 지금 우리 입에 들어가는 그 고기는 소.돼지의 원망심과 눈물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자는 원칙을 세웁니다. 그러나 원칙은 모두 이치가 바탕이되는 원칙인 것이지 이치가 없는 원칙은 원칙 그 자체로 도그마가 됩니다. 자연스러움과 조화로움이 없는 원칙론자적인 계율은 예전부터 불가에서는 파계라는 진짜 계율의 모습으로 새롭게 계율의 근원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가령 임진란때의 승병들은 살생이 아닌 무수한 살인을 합니다. 계율만으로 따지면 그들은 불교도가 아닙니다. 사명대사는 가등청정이 당신은 승려이면서 어떻게 살인을 할 수가 있냐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만일 내가 지금 살인을 하지 않는다면 더 큰 살인을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계율은 이치가 근본이 되어서 나올 때에 계율인 것이지 진리나 이치는 없이 행동규범일 때에는 계율이 아니라 속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개체적 생명관 나 따로 하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생명, 너 따로 하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생명속에 있을 때에는 어떤 계율도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너와 내가 모두 부처님이라는 절대적 진리 자체속에서 진리로서의 하나일 때에 그리고 진리로서의 하나임이 사실이므로 내가 불교도고 네가 기독교인이라는 이 자체조차도 진리의 하나됨의 드러남이라는 사실일 때에, 그것은 사실이므로 이미 구원되었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끝난 영생속의 삶의 원리가 계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