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6년08월20일(화) 11시12분09초 KDT 제 목(Title): 부처와 나 사이에... 부처님을 나라는 존재의식이 싹트게 만드는 나를 살려주는 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힘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만 이것은 부처님을 밖에서 찾아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불교에서는 "외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나를 살려주는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힘과 "나" 사이에는 어떤 거리와 틈이 있는 가 하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찰나의 틈도 그리고 털끝 만큼의 거리감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나와 부처님은 처음부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본래부터 나는 부처님과 조금도 시간적 공간적 단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란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이제 우리를 살려주는 힘에서 상대가 없는 즉 구분이 없는 절대라는 의미가 함께 하게 됩니다. 외관을 통하여 부처님과 "나"라는 존재감속에서도 이치적인 확인을 할 수가 있지만 보다 자유로운 속박이 없는 삶으로 전환하는데는 이치적인 외관보다는 내 마음속에서 부처님을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나"라는 이 존재감속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성자도 "나"라는 존재감이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단지 그 "나"라는 것이 객관적인 대상과 분리되어 구분된 "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남과 구분된 나가 아니기에 "나는 없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불교는 속박감 그리고 대립된 삶의 주체로서의 "나"를 자유의 주체로서 그리고 평화의 주체로서의 "나"로 탈바꿈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 되는 셈이고 그 다음은 자유와 평화의 삶을 영원히 계속하는 성불이라는 과정이 또한 목적이 되는 셈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는 내 마음이라는 것 속에서 부처님 즉 무한성과 영원성을 확인하여야 합니다. 이를 "외관"에 대비하여 "내관"이라고 하고 선정이다 혹은 염불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부처님과 "나"라는 존재의식이 서로 둘이 아님을 삶의 주체인 "나" 속에서 확인할 때에 모든 속박은 저절로 해결될 뿐만 아니라 "나"라는 것으로 표현되는 우리들의 삶은 무한한 가능성의 삶으로 도약하는 거침없는 "사자"의 삶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외관을 한다고 하였지만 외관하는 것은 아직 완전하지 못한 것이 외관의 모든 것을 인지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면 우리 마음은 우주보다도 더 크고 시간적으로는 태초보다도 더 먼저이기에 그것을 인지하니 이치적으로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어도 안이야 말로 참으로 시공을 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던지 세상에 나왔으면 잘살아야 하고, 후회없이 마음껏 자신을 드러내야 세상살이하는 보람이 있는 것이고 뒤 끝이 깨끗한 법입니다. 그 마음껏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자신의 가능성과 무한함을 아는 삶과 어느 순간에 잠시 보여진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그것이 자신의 전부라고 결론지은 삶은 세상살이에서 조차도 벌써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과 "나" 사이에 하나도 빈틈이 없다는 것을 비록 깨치지 못하였어도 이것을 믿는 것 만으로도 삶은 지평은 무한히 열리기 시작할 것이고 이해하는 것 만으로도 앞으로의 삶을 열어나가는데 있어서 자유를 보장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거나 이해하거나 혹은 풀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하면 그 복덕의 결과는 말해도 믿을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끝없는 과거무량한 부처님들과 종말없는 미래의 무량한 부처님들이 모두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부처님들과 우리의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