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Davin (다빈) 날 짜 (Date): 2010년 10월 28일 (목) 오후 11시 32분 51초 제 목(Title):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란 무엇인가/최봉수 550p맺는 말 ...1불교란 종교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를 철학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불교는 물론 종교이다. 인간이 지닌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불교는 충실히 해답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 주장을 신앙하는 무리들이 세계적으로 수억 명에 이르고 있고, 아울러 그들에 의해 영위되는 다양한 의례를 갖추고 있는 문화현상이 불교이기에 그것은 종교이다. 단순히 창조신을 세우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는 식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면 종교는 무엇인가. 그것은 만남이다. 부처님의 자비가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그것이 부처님의 가슴 속에 자폐되어 있기만 하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아무리 웅장하다하더라도 그 또한 부처님의 내면세계에 갇히어 있기만 하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을지 모른다. 오늘 하루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어야 하기에 그 사랑, 그 깨달음이 우리와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만남은 그냥 아무렇게나 만나도 되는 것인가. 반드시 진리를 전제로 만나야 한다. 결코 거짓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진실만이 진리만이 우리를 건질 수 있고 우리를 구해 줄 수 있음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진리는 썩 재미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리고 거짓이 오히려 매력적이고 즐거운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는 진실이어야 하고 진리이어야 하니 비록 심심하게 보이더라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포용이다. 바로 이단을 포용하여 하나로 만든 것이 진리이다. 이단이 있다면 그것은 벌써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모든 것을 시간, 공간에 관계없이 감싸 안기에 보편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철학이든 종교든 동의하는 진리의 첫째 조건이다. 그렇다면 형식논리상 진리에 이단은 없어야 한다. 이단을 포용하려면 또는 이단에 대해 관용하려면 우리는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고 본다. 불교 외의 종교들 특히 유신론적인 종교들은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자신들이 믿는 신과 다르면 그것은 틀린 것이라고 보고 없애려 한다. 그러나 파란 옷도 있고 붉은 옷도 있으며 그 두 옷은 다를 뿐이지 어느 하나가 틀린 것은 아닌 것처럼, 우리는 다른 것을 다르다고 보고 담담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니 그것을 갖춘 것이 불교이다. 이처럼 이단을 포용하는 진리를 바탕으로 부단히 만남을 이루어 나가는 진정한 종교가 불교이다. 2. 불교는 인간이다.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것을 신학이라고 한다. 그러면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것은 무어라고 하는가. 일반적으로 불교학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독교학이라는 말보다 신학이라는 말이 세련되어 보인다면 불교학보다는 인간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기독교가 신에 의한 신을 위한 신의 종교라면, 불교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교에도 도솔천신, 제석천신 등 신 관념이 출현하지만 그것은 선업에 의한 과보로서 생성된 신으로서 역시 중생의 일종이다. 결코 절대 유일의 창조적 권능을 지닌 인격신은 아니며 그러한 것은 없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불교에 있어 인간의 중요함은 유신론적 종교의 신과 같다. 그러면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계이다. 어떤 인간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언제나 서로 관계하는 공동체 속에서의 존재라는 것은 불교에 있어서만큼은 진리이다. 무아를 주장하는 이유도 나 혼자만의 존재가 불가능하다는 성찰에 바탕을 둔 것이고, 자성이 없다고 한 것도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는 단순히 다른 것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것과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지 모른다. 이처럼 우리가 존재하려면 관계가 잘 유지되어야 하는데 관계를 잘 유지하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그것은 희생이다. 세상에 많은 문화현상이나 인간의 활동과 종교가 뚜렷이 구분되는 몇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기적과 희생이다. 세상에는 기적도 없고 희생도 없다. 그러나 종교에는 기적이 있고 희생이 있다. 하지만 우리 관계는 기적은 없어도 될지 모르지만 항상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다. 모두 이기려고만 해서는, 모두 가지려고만 해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고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으리라.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 누군가 지고 누군가 포기해야 한다. 종교는 그리고 불교는 그 누군가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희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시이다. 베푸는 것이다. 재물이 필요한 자에게는 재물을 베풀고, 법이 필요한 자에게는 법을 베풀고, 따뜻한 말이 필요한 자에게는 따뜻한 한마디 말을 해주는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가르침의 시작을 실제 시론(施論) 계론(戒論 ) 생천론(生天論)으로 설하셨거니와, 이것은 불교에서 본 모든 선행의 근본이자 시작이 보시임을 천명한 것이다. 보시는 참으로 공덕이 크다. 그것은 단지 좋고 선한 과보를 불러들이기 때문만은 아니니, 보시를 함으로써 우리의 아집도 같이 사라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그래서 보시를 신중히 잘하라고 하셨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보시를 잘하는 것인가. 네 가지 조건을 드셨다. 첫째, 귀하고 아끼던 것을 보시할 것. 둘째, 기쁜 마음으로 보시할 것. 셋째,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할 것. 그리고 마지막 넷째, 인과법을 철저히 믿으면서 보시할 것 등이다. 이처럼 베푸는 보시야말로 가장 적절하고 위험하지 않은 희생의 방법이며, 희생이 이루어질 때 관계가 발전적으로 유지되며,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비로소 온전히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불교이다. 3. 불교는 힘이다. 힘든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는 무엇보다도 힘이 필요하니, 불교가 힘을 가벼이 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흔히 일체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할 때, 그때 불성은 부처가 될 가능성이나 부처의 성품 정도로 해석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썩 마음에 드는 이해라고 할 수 없다. 불성이란 바로 부처를 이룰 힘을 뜻한다고 보아 무방하니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은 모든 중생에게 부처를 이룰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해석해야 핵심을 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힘은 어디에서 올까. 그것은 화합에서 온다. 흩어지고 분산되면 그것은 의미 있는 힘을 일으키지 못한다. 뭉치고 모여야 만이 제대로 된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모든 것은 따로따로 떨어져서 존재하지는 못한다. 결국 한 데 모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 데 모여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힘은 화합한 집단에서만 가능하다. 중생이 화합하면 그 힘이 우주를 굴리는 창조적 위력으로까지 격상될 수 있음을 이미 부처님은 공업(共業)을 설하면서 지적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단 한마디만 남기고 가신다면 어떤 말을 하실까 생각해 보면 그 말은 “공생 아니면 공멸”이라는 말씀을 남기지 않을까 한다. 같이 살려고 하면 다 살 수 있지만 혼자 살려고 하면 다 죽을 수 있다는 이 말씀의 의미는 화합의 절박함을 잘 드러낸다 할 것이다. 그러면 화합은 어디서 올까. 화합은 청정에서 온다. 구성원 개개인이 청정할 때 집단의 화합은 보장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은 구성원 개개인이 청정할 때 상호간에 신뢰가 가능해져서 비로소 화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오탁악세에서 청정하게 사는 것을 귀히 여긴다. 청정한 데서 청정하게 살기는 쉽지만 탁하고 더러운 곳에서 청정하게 살기란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탁하고 흐린 곳이라 하더라도 청정하게 살 수 있으니 그 도리를 밝힌 경전이 법화경이고 그래서 법화경의 갖추어진 이름이 묘법연화경이지 않은가. 묘법은 불교이다. 그리고 연화는 연꽃 중에서도 푼다리카 연꽃 즉 백련, 흰 연꽃을 의미한다.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도 조촐한 청정함을 잃지 않은 채 피어오르기 때문 아닌가. 그저 불교는 그리고 불교인은 언제 어느 곳에서도 깨끗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조촐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맑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면 청정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계율에서 온다. 계율이란 지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빼앗지 않는 것이다.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불자라면 지켜야 할 기본적인 계율로서 오계가 있다. 오계는 살생과 도둑질과 사음과 거짓말과 음주를 금하라는 계율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금하라는 것들을 자세히 보면 공통점이 있다. 살생은 남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고, 도둑질은 남의 재물을 빼앗는 일이며, 사음은 남의 순결을 빼앗는 일이다. 그리고 거짓말은 남의 진실을 들을 권리를 빼앗는 것이며, 음주는 자신의 이성을 빼앗는 짓이다. 결국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빼앗지 말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줄지언정 빼앗지 말라는 뜻이 계율이다. 이처럼 최소한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는 계율을 준수함으로써 청정을 유지할 수 있고, 청정함으로써 화합을 성취할 수 있으며 화합을 통해 힘을 극대화하여 어려운 세상도 능히 살아가게 하는 것이 불교이다. 4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불교는 행복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종교가 어디 있겠는가만 유달리 불교는 행복의 종교라고 불릴 만하다. 기독교와 같은 유신론적인 종교가 오직 신의 영광만을 최우선적 가치로 삼기에 영광의 종교라고 규정되는데 비해 분명 특징적인 것이다. 불교는 오직 중생의 행복, 천신과 인간의 행복, 그리고 나와 남의 행복만을 그 궁극의 목표로 삼는 행복의 종교이다. 불교에서는 이처럼 인간의 행복 이외에는 그 무엇도 더 중요할 수 없다. 불교 그 자체마저도 우리의 행복보다 가치가 높지는 못하기에 불교는 불교를 위해 전쟁을 벌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금쪽같이 소중한 우리 인생은 아무쪼록 행복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 자신의 행복만큼 소중한 것이 솔직히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면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믿음에서 온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무언가를 우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아직 보지 못했고 제대로 이해된 것은 아니지만 먼저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실로 생존의 조건이다. 예를 들어 고층 건물 속에서 업무를 보는 것도 그 건물이 튼튼하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 우리는 그 건물을 제대로 짓는지를 보지 않았는데도 잘 지었을 것이라고 먼저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행복과 관련하여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며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믿는다. 부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많은 말씀이 있지만,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신의 뜻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운명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가짐에서 모두 일루어진다는 말씀을 들 수 있다. 일체유심조(一 切有心造)라는 말이 아마 그 뜻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위대한 것일까. 서양의 어느 철학자 말대로 갈대처럼 연약한 것이 인간의 마음 아닐까. 그러나 분명 불자들이 믿는 부처님의 말씀 한가운데는 우리 마음에 대한 신뢰가 들어 있음은 사실이다. 신심(信心)이라는 한자어를 그래서 어떤 학자는 불교에서만큼은 ‘믿는 마음’이라고 해석하기보다는 ‘마음을 믿는 것’이라고 해석하자는 제안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면 마음의 위대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또한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깨달음에서 온다, 그러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우리 마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직접 알고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결국에는 내가 직접 봐야 한다. 그리고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믿음은 자연스러워지고 완벽해진다. 어느 종교처럼 그냥 믿기만 해서는 그 믿음의 뒷면에 숨어서 자라나는 회의를 잠재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생리이니, 부처님은 완전한 믿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눈으로 보고 머리로 알아낼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깨달음은 자주 지견(智見)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깨달음은 그야말로 깨는 것이다. 직접 알고 보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태에서는 안 되니 새로운 눈으로 깨어나야 하고, 나아가 알고, 보고 깨어나는 데 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면 깨달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수행에서 온다. 그러면 수행은 무엇인가. 수행은 단순히 닦는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바꾸는 것이다. 악하고 삿되고 속되고 미혹한 버릇을 선하고 바르고 참되고 밝은 버릇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하여 육안(肉眼)을 천안(天眼)으로 바꾸고, 천안을 혜안(慧眼)으로 바꾸고, 혜안을 법안(法眼)으로 바꾸고, 법안을 불안(佛眼)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나쁜 버릇을 좋은 버릇으로 바꾸고 우리의 어두운 현실의 눈을 새로운 밝은 눈으로 바꾸게 하는 것이 수행이다. 이러한 수행에서 깨달음이 오고, 깨달음에서 믿음이 오며, 믿음에서 행복이 옴을 설한 것이 불교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