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Enlight (D.S.) 날 짜 (Date): 2003년 6월 24일 화요일 오후 12시 22분 05초 제 목(Title): Re: 묵조선 주시와 관찰은 같은 말입니다. 불교용어로는 마음챙김 또는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념을 말합니다.어떻게 해야 사념이나 망념들을 바라 보느냐 하면 여기에는 약간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그동안 전혀 이러한 일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밖으로 향하던 마음을 내면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주 연습하다보면 관성이 생겨서 쉽게 될수 있습니다. 불교용어로 이것을 회광반조라고 하지요. 예를 들면 길거리에 돈이 떨어진것을 보고 줍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고 합시다. 이때 '앗, 내 마음속에서 돈은 줍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으면 돈을 가질까 말까 갈등이 생기게 되니 번뇌는 계속 일어납니다. 참선을 하는 이유는 아주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까지 주시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무리 조용한 공간에서 고요하게 좌선을 해도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이라던지 과거의 억울했던일, 미래에 대한 모종의 희망사항등등... 그럴때 마다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주시하는 것이죠.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큰 싸움이 되서 결국 살인을 하는 사건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그대로 놔둔 결과가 큰 사건을 불러 오는 것이죠. 화가 날때도 '지금 화가 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마음을 챙기는 것이죠. 마음챙김 (sati)과 반조는 동시에 일어나는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동전의 앞 뒤면 처럼 어느 하나를 고집할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 보지는 않습니다. 마음챙김(사티)이라는 것은 어떤 망념이 일어 났을때 그것을 바라봄(반조)와 그순간 망념을 떠나서 마음의 근본인 의식을 바라보는 반조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봅니다. 사티라는 것은 염(念)으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불유교경에 나와 있습니다. 정념(sammyak-sati)수행과 비파사나(vipassana, 중도선정법), 그리고 사마타관법(일념선정법)의 근간에 당연히 마음챙김(사티)가 자리하게 된다고 봅니다. 대념처경에서는 마음챙김의 대상을 몸이나 사성제등으로 제시해 놓았는데, 선불교에서는 그것들을 화두로 대치해 놓았을 뿐 결국 염불을 하던 참선을 하던 궁극적 목표인 삼매에 이르게 한다는데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 봅니다. 회광반조라는 말이 있는데 결국 반조는 내면을 바라 보는 것이므로 마음챙김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번뇌가 곧 보리다' 라는 말은 번뇌가 일어나는 순간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기 때문에 보리 즉 자성을 바라보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때문입니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굳이 마음을 바라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관자재보살님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실때 오온이 텅빈것을 밝게 비춰보았다'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밝게 비춰본다 (조견 )이라는 말이 바로 반야바라밀 수행입니다. 단지 바라볼뿐 다른 것은 일부러 할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라는 것은 존재의 그림자일뿐 존재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은 환상이기때문에 밝게 비춰보는 순간 없어진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만들어 내는 허상들 (쓸데없는 잡생각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죠. 삼매에 들어서도 반야를 행하라는 말은 자칫 삼매만 수행할경우 모든 것이 끊어진 무기공에 빠질우려가 있는데 반야(바라봄)을 갖이 수행할경우 심지어 삼매에 들어서도 자신이 삼매에 들었다는 것을 인식할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정혜쌍수'를 주장하신 것입니다. 수행자가 해야할 일은 결국 바라보는자로 남는 것이 됩니다. 단지 관찰자로 남을뿐 그 밖의 것들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망상에 끌려가고 자아를 충족시키는 훈련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극단적인 고행같은 것을 통해 해탈하려하는 것은 해탈을 얻기 위해 일부러 고행을 함으로서 일종의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것또한 자아(ego)의 미묘한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ego는 욕망입니다. 욕망은 그동안 습관적으로 존재의 주인이라고 여기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챙김을 통해 욕망이 제거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동안 욕망이야 말로 존재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욕망을 없애는 것은 마치 존재를 죽이려는 일로 생각이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참선하다가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고는 수행을 계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수행을 통해 ego가 사라지게 될 지경에 이르자 살아남기위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즉 두려움이라는 신호를 보내서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너가 계속 수행하면 존재의 주인인 ego가 사라지게 된다. 이래도 두렵지 않느냐?' 하고 경고를 보내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수행을 멈추면 결국 다시 ego가 주인이 되어 욕망에 따라가게 됩니다. 이럴수록 열심히 용맹정진하여 ego의 뿌리를 뽑아야 하는 것입니다. -------------------------------------- Show me your smil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