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Param (파람) 날 짜 (Date): 2003년 2월 24일 월요일 오후 02시 55분 06초 제 목(Title): 퍼온글/ 오온 30.오온(五蘊) 부처님께서 33천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하시 고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시려 할 때,헤아릴 수 없이 많 은 천상인들이 모였다.그 때 부처님께서 설법하셨다. '다서 가지 쌓임(五蘊)이 괴로움이다.오온이란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니라. 무엇을 색(色)이라 하는가? 우리의 육신이니,사대(四大)와 사대가 만든 육신(四大所造 色)이니라. 수(受)는 감정이니,괴로움,즐거움,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상(想)은 생각이니,과거,현재,미래 즉 삼세가 함께 모인것 (三世共會)이니라. 행(行)은 행위이니,몸과 입과 뜻의 움직임을 말한다. 식(識)은 분별이니,눈으로 보고,귀로 듣고,코로 냄새 맡으 며,혀로 맛보고,피부로 느낀 것을 분별하는 것이니라. 느낌은 감각(覺)을 말하고, 생각은 앎(知)을 의미 한다.행위 는 스스로 이루는 것(能有所成)이니,악행도 하고 선행도 한 다.의식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갖가지 맛을 따지는 것이 다.이 다섯 가지에 의해 삼악도(三惡道)와 천상(天上)의 길과 인간의 길이 있게 된다. 이 다섯 가지에 매달리지 않아서 집착을 없애면 열반의 길이 열리느니라' 증일아함경 제28;청법품5;<2-707중> 오온 [ 五蘊 , pauca-skandha ] 요약 불교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인 색온(色蘊)과 정신요소인 4온을 합쳐 부르는 말. 본문 구역(口譯)에서는 오음(五陰)이라고도 한다. 온이란 곧 집합 ·구성 요소를 의미하는데, 오온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이다. 처음에는 오온이 인간의 구성요소로 설명되었으나 더욱 발전하여 현상세계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었다. 오온이 인간의 구성요소를 의미하는 경우에는 ‘색’은 물질요소로서의 육체를 가리키며, ‘수’는 감정 ·감각과 같은 고통 ·쾌락의 감수(感受)작용, ‘상’은 심상(心像)을 취하는 취상작용으로서 표상 ·개념 등의 작용을 의미한다. ‘행’은 수 ·상 ·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특히 의지작용 ·잠재적 형성력을 의미한다. ‘식’은 인식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약해서 명색(名色:名은 4온에 해당)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오온은 현상적 존재로서 끊임없이 생멸(生滅)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주(常住)불변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불교의 근본적인 주장으로서의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를 설하는 기초로서 설명되었다. 부파불교의 아비달마(阿毘達磨) 철학에서는 ‘식’은 마음의 주체[心王], ‘수’,‘상’,‘행’은 마음의 부분적 작용 ·상태 등의 속성[心所]이라고 하며, ‘행’에는 또한 마음의 작용 이외에 물질 ·마음을 작용시키는 힘[心不相應行]도 있다. ‘색’의 개념도 원시불교에서의 상식적 ·구체적 존재에서 물질의 형식 ·성질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오온설의 철학적 의미는 모든 인간계가 실체가 없는 가화합(假和合) ·개공(皆空)으로 이루어진 현상적 존재이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 오온개공(五蘊皆空) 등의 말뜻이 그것이다. <58>세존의 채찍③ - “오온 통괄하는 주체는 없다” - - 모든현상 내것 아닌 일어난 것 - “내 발에 무좀이 있다”고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표현법이 아니다. 이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요소도 근본적 사실, 즉 다르마(法)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르마에는 ‘발’도 없고, ‘무좀’도 없고, ‘있다’도 없고, 더구나 ‘나’는 없다. 그럼 무엇이 있는가. 오온(五蘊)만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가리킨다. 오온은 보다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사실로서의 다르마를 대표한다. 아비다르마는 이들을 통해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경험을 설명하는 독특한 방식을 창안했다. 이에 따르면 앞의 사실-경험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1) 물질(色): 여기 있는 이것은 형체, 즉 ‘물질’로서의 발이다. 2) 느낌(受): 가렵고 스멀거리는 ‘느낌’이 있다. 3) 지각(想): 무좀 있는 발을 보고 만지는, 또 괴로움을 아는 ‘지각’이 있다. 4) 의지(行): 무좀은 ‘의지적 반응’을 수반한다. 고통에 대한 불만과 조바심, 그리고 치유에 대한 바람 등. 5) 의식(識): 이 모든 과정을 자각하는 ‘의식’이 있다. 아비다르마는 모든 사실과 경험을 이 틀에 의해 해체하고 정돈했다. 궁극적 사실로서의 다르마들을 정립하고, 그 다르마들 사이의 관계를 분류 결합하여 목록을 작성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아비다르마논서들에는 별다른 문학적 향취나 수사를 찾을 수 없다. 흡사 회계보고서나 물리학의 공식을 보는 듯이 지극히 건조하고 딱딱하다. 대체 어째서 이런 재미없는(?) 작업을 그토록 힘들여 하고 있는가. 그 의도는 하나로 귀결된다. 세계를 자아화하는 인간의 뿌리깊은 습성을 치유하고 뿌리뽑자는 것! 아비다르마는 ‘무아(無我)’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적 훈련이다. 앞의 분석을 자세히 보면, 거기서 어느새 ‘나’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무좀’과 그로 인한 ‘고통’의 느낌,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겠다는 ‘열망’은 ‘나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오온(五蘊)은 말 그대로 ‘다섯 무더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흡사 장작 더미처럼 쌓여 있을 뿐, 이들을 통괄하는 주체, 혹은 중심은 없다.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은 다르마들일 뿐, 이를 통괄하는 자아 혹은 인격이란 실재하지 않는다. 나가세나가 그래서 말했다. “왕이시여, 수레의 자성(自性)은 어디 있습니까. 굴대입니까. 바퀴입니까. 수레란 흩어진 재료들이 모인(蘊) 것일 뿐, 그 통합적 실체는 없습니다.” 아비다르마는 말한다. 모든 현상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일어난 것일 뿐이다. 그런데 무시이래의 무명(無明)의 오랜 습성때문에 이를 ‘나의 것’으로 착각하는 우를 저지르고 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뿌리가 바로 이 동일시(identification)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 무지(無明)을 타파하기 위해 아비다르마는 지리하고 힘든 고육(苦肉)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다르마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심리학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도 마음먹고 이 체계에 따라 명상해 나간다면 자아의 점착성을 떨치고 고요와 평화에 이르는데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불교사적으로 보아도 이 ‘해체적’ 분석의 의미는 심대하다. 다르마 분석은 초기불교의 주춧돌이었다. 상좌부(上座部)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말하는 ‘지혜’란 바로 이 ‘다르마의 체계적 분석과 그 조직적 명상’을 의미했다! 대승은 이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독자적 성립을 기약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려 한다. 사찰에서 늘 독송되는 대승경전의 심장인 ‘반야심경’을 기억할 것이다.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하실제,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보시고, 일체의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나셨다. 사리자(舍利子)여, 색(色)은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空)은 색(色)과 다르지 않다. 색(色)은 공(空)이고 공(空) 또한 색(色)이다.” 우선 몇 가지가 눈에 띈다. 주인공부터 소승의 ‘아라한’에서 대승의 이상형인 ‘보살’로 바뀌었다. 그 보살은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구원을 얻었다. 여기서 우리는 대승이 오온을 궁극적 실재(다르마)로 규정하는 아비다르마에 대한 교리적 혁신을 선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사리불이 교화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그때문이다. 사리불(Sariputra 舍利佛)이 누군가. 바로 그 다르마의 조직적 분석과 명상을 지혜로 삼고 초기불교를 체계화한 사람이 아니던가. 대승은 사리불을 앞에 꿇어앉힘으로써 소승의 불완전성을 지적하고 자신들의 권위와 정당성을 인정받는 이중적 효과를 노렸다. 이런 구성의 의미와 맥락을 놓치면 우리는 ‘반야심경’의 소식을 그 충분한 깊이와 넓이에서 읽을 수 없게 된다. 한형조<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