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Param (파람) 날 짜 (Date): 2003년 2월 12일 수요일 오후 11시 37분 47초 제 목(Title): 김종락/ 도법스님 인터뷰 출처: 문화일보 <인터뷰>"사는것이 곧 수행 깨침위해 쉼없이 공부" 지난 주말 2박3일간 실상사에 머물며 경험한 도법(지리산 실상사 주지)스님은 바쁜 승려였다.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예불과 1000일 기도만 해도 4~5시간은 걸릴 만큼 만만찮았는데, 쉴만하면 갖가지 사연을 안은 신자와 취재기자, 도반들이 수시로 처소를 찾았다. 여기에다 스님이 벌인 불교계 안팎의 각종 행사와 회의가 이어지고 절살림까지 책임지다 보니 분주하기가 웬만한 사업가 뺨쳤다. 지역의 할머니 신자들에게는 알아 듣기 쉬운 법문을 하지만, 쟁쟁한 학승들과의 논전에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이론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각종 회의에서 아이디어를 짜내는 일도 여간 아니었다. 주목할 것은 그럼에도 늘 잔잔함과 평안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님을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궁금할 수밖에. ―이렇게 바쁜데, 공부와 수행은 언제하십니까. “나 공부 안 해.” ―그래도 머리를 깎고 출가한 데는 뭔가 큰 뜻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난 그 뭐, 거창한 의문이 있어 출가한 것은 아니오. 18살짜리가 뭘 알았겠어. 그냥 인연따라 자의반 타의반 절에 들어온 게지.” ―그럼, 스님들이 흔히 말하는 발심(發心)같은 게 없었나요. “물론 내게도 그런 때가 없진 않았어요. 스물한살 때인가, 해인사 강원 시절에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절에서 꼼짝을 못한 거야. 그땐 출가하면 부모 형제와는 완전히 인연을 끊는 시절이었지. 그렇게 갇혀 어머니를 생각하노라니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드는 거라. 말하자면 발심이지.” ―그 의문은 이제 풀렸는지. “아니, 지금도 공부 중이지.” 진리를 찾기 위해 선방에서 화두를 들던 이가, 그 진리를 팽개친 채 사회 참여를 한다… 조금전에는 공부 안한다고 했다가 이젠 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소린가. “선방에서 화두를 참구해도 문제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어요. 왜 풀리지 않을까, 이렇게 수행하면 깨칠 수나 있을까. 도대체 깨친 것은 뭐냐, 석가모니는 이 길을 가긴 갔는가, 의문이 생기더군.” 문제의식이 한국불교의 수행방법에 이르고,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을 돌아보게 된 것은 그런 의문을 가지면서부터다. 석가모니 가르침의 근본을 생각하며 돌아본 한국불교는 문제투성이였다. “부처님의 사상과 정신이 뭔지 알아야 제대로 중노릇을 할 것 아니오. 그래야 부처님이 절을 만든 취지도 실현할 수 있고…. 그러자니 불교를 역사적, 시대적 맥락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옛 전통 강원에서는 그게 부족했어. 왜 초기불교가 소승불교를 거쳐 대승불교로 발전했느냐, 초기불교의 핵심 사상인 팔정도가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로 바뀐 배경이 무엇인지 알아야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 불교는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지.” ―그게 사회 참여와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불교에서의 공부가 뭐냐. 진리에 눈뜨고, 진리에 다가서고, 진리와 하나되는 작업 아닙니까. 그 진리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어야 해요. 그렇다면 어찌 경전 공부만 공부고, 좌선하는 것만 수행이겠어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고민하는 것, 이 모두가 수행이자 공부 아니겠어요.” ―스님이 청정 불교운동을 벌이고, 생명공동체 운동을 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봐야겠군요. “세상이 어찌됐든, 나만 깨치면 된다는게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이겠어요? 15년전 개혁승가결사체인 ‘선우도량’을 결성해 종단개혁과 교육제도 개선, 청정수행운동에 나선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워보자는 것이었어요. 이번 ‘금강경 결제’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기자는 역시 말귀가 어두운 것인가.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십수년 동안 선방을 떠돈 스님의 마음이 다시 궁금해졌다. ―몇해 전 어느 능력있는 사판승(주지 등 행정승을 일컫는 말. 도법도 사판승이다)이 세상을 떠나면서 ‘다음 생에는 반드시 선방 수좌로 태어나 깨침을 얻고 싶다’고 말했다는데. “이판(선승을 일컫는 말)과 사판, 수행과 생활은 따로 있는 게 아니야. 방법만 다를 뿐 수행이라는 점에서 이판, 사판이 똑같아요. 그런 점에서 아직 완전한 깨침을 얻지 못한 나는 ‘지금 여기서’도 항상 공부하고 또 수행할 뿐입니다.” 스님에게 ‘공부한다’는 것과 ‘공부안한다’는 것은 다른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공부는 바로 세상과 함께하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