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Enlight (D.S.) 날 짜 (Date): 2001년 4월 29일 일요일 오전 01시 46분 52초 제 목(Title): 남전이 고양이를 죽인일 오늘 토요일 아침 일어나자 마자 빨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세탁기로 돌리지 못한 것들을 손빨래로 하는데 문득, 남전선사의 일화가 하나 생각나더군요. 하루는 남전이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어떤 중이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고 합니다. 중은 남전이 빨래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보다 가 물었습니다. "화상께서 아직도 이런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남전이 물에 젖은 빨래를 들어 올리며 말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일화는 빨래에 대한 이야기를 즉시 다른 뜻으로 변화시킨 남전의 통 찰력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빨래를 빨래로 보는게 바로 여여함 이라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빨래 를 하는 그 일에 몰두하는 것 이상 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여지가 끼어들수 없는 것이 그 순간 완벽한 선의 경지라는 것을 말해주 는 멋진 일화라고 생각됩니다. 아무튼 빨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고 남전이 고양이를 죽이고 귀종이 뱀을 죽인 일에 대해 한번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남전이 고양이를 죽 인것에 대한 해석은 몇년전 이 보드에 설명해 놓았으니 궁금하신분은 그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다른 시각에서 그 런 일화를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선문답이라는 것은 전에도 말했듯이 그 상황에 있지 않고서는 그 뜻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남전이 고양이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다 르게 해석될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당연히 다르게 설명되어져야합니다. 왜냐면 선문답이 던져진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크로체님은 남전의 입장에서 그 선문답을 설명했지만, 스테어님께서는 뱀이 억울하다, 중이 나쁜 놈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누가 옳고 누가 틀리다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두분다 옳다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면 두분 말씀에서 틀린점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가 하고 싶은 말은 참과 것짓의 명제가 아니라, 불성이라는 것입니다. 크 로체님이 남전의 일화를 올린것은 불성을 보기 위함이고, 스테어님이 뱀 의 입장에서 억울하거나 불쌍하거나 하는 것 또한 불성의 작용이기 때문 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죽은 고양이나 뱀을 보고 측은한 마음을 냈다면, 그게 바로 불성의 작용입니다. 그 순간 그러한 마음의 작용을 본다면 바로 그 게 불성을 보는 것이고, 거창하게 말해서 견성하는 것이고 자신의 부처 를 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 안의 부처를 보지 못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불성이 작용하고 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뱀이나 고양이가 죽는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을 냈을때 그 러한 마음이 나오고 있다고 보면 그 순간 견성입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 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전 택시비 문제로 승객과 기사가 말다툼하다 가 승객이 기사를 칼로 찔러 죽인 일이나, 잔소리하는 직장상사를 그 자 리에서 칼로 죽인 일이나, 마음의 작용에 놀아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화가 나고 분노가 치미는 일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생겨나 는 것은 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과 하나가 되어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때 그것을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분노가 내 속에서 생겨나는 것을 볼 뿐입 니다. 불쌍한 일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생겨 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 이 생겨나는 것은 보지 않고 있습니다. 어떠한 마음의 작용이 생겨나던 그것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남전이 빨래를 하다가 '이것'에 대해 그 밖에 무엇을 더 할수 있겠는가? 라고 말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 습니다. 사람들은 매 순간 불성이 나오는데도 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 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물론 이 순간 저는 안타까움이라는 것이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 밖에 무엇을 더 하겠습니까? 방편이라는 것은 사람에 맞춰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나에게 이해되지 않게 설명한다고 해서 설명하는 사람이 잘 못 되었다고 하더나,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상대방을 폄하하는 것은 모두 방편의 잘 못된 선택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처입니다. 이것은 부처 님이 이땅에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이거나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단 지 그것을 보느냐 못 보느냐 이외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이게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올려보겠습니다. 옛날 인도에 스승이 한분 계셨는데, 하루는 왕비가 그 스승을 초대하 여 후하게 대접하고 집으로 돌아갈때 은 쟁반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한 한 도둑이 그 스승의 뒤를 쫓아가 그 은쟁반을 훔칠 계획을 하고 스승의 뒤를 밟았습니다. 스승은 이러한 도둑의 마음을 알 고 집에 가서는, 그 도둑이 집에 들어와 은쟁반을 훔치게되면 그 도둑은 도둑질이라는 업을 짓게 되니까, 그 도둑이 업을 짓지 않도록 일부러 은 쟁반을 창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도둑은 이게 왠 횡재냐 하면서도 속으 론 무척 궁금하여 창안을 들여다 보니 스승은 그냥 누어 있는 것입니다. 그때 스승은 도둑에게 궁금한게 있으면 들어와서 물어보라고 합니다. 도 둑은 위험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스승께 나아가 물어봅 니다. "왜 은쟁반을 창밖에 던지 셨습니까?" 스승은 내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걸 원하는 사람이 창밖에 있어서 그랬을 뿐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도둑은 훌륭한 스승임을 알아보고는 도둑질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자신에게도 가르침을 줄수 없냐고 부탁 합니다. 그러자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른 스승들은 너에게 도둑질을 하지 마라!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가르침은 전하 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하는 것을 바라 보기만 하면 된다. 도둑질을 할 때는 단지 도둑질을 하는 자기 자신만 바라볼 뿐이다. 그 이외에는 다른 것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마라." 그 도둑은 스승의 말대로 도둑질을 할때마다 도둑질을 하는 자기 자신 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흘이 지나서 그 도둑은 스승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난 사흘동안 저는 아무것도 훔칠 수가 없었습니다. 도둑질을 할때 마 다 도둑질을 하는 저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럴때 마다 손에 힘이 풀려 도저히 도둑질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젠 도둑질을 할수 없게 되었 으니 제가 먹고 살기 위해 하던 일들을 할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를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진정한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 Show me your smil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