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feeling (김종선) 날 짜 (Date): 2001년 2월 4일 일요일 오후 05시 40분 53초 제 목(Title): Re: 겸손함과 자유 순수관찰에 의지가 개입된다는 것은 '나'가 순수관찰의 영역에 붙어 있다는 것이죠. 이 '나'에서 판단,수정의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이 '나'가 순수관찰의 영역에서 떨어져서 대상으로 나가야됩니다. 그래야 진실로 순수관찰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본래의 상태가 바로 이것(진실한 순수관찰의 상태)입니다. 이 '나'(에고)가 순수관찰의 지점에서 교묘히 남는 것은 정신수행자들만이 갖는 병이죠. 보통 사람들은 이 상태까지 가지 않습니다. ================================================================== 결국 님의 글을 보니 순수 관찰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통째로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마치 거울과 같이 비추는 기능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고 또한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감정의 움직임이나 생각의 과정을 기억하고 또한 드러냅니다. 기억한다는 것을 분석하면 결국 "스스로 살피는 행위(자기관찰)"와 "수용하는 행위(기억)" 그리고 "드러내는 행위(recall)"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가 행하고 있는 기본적인 특성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존재의 특징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주의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깨달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에고는 감정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자극에 중요도를 부과한 채로 일어나는 행위를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기존의 나는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매 순간 일으키는 행위가 이것에 의해서 왜곡되는가 아닌가를 판단하여 하나씩 재구성 하는 것입니다. 이 새롭게 탄생하는 나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깨달은 자의 행위일 것입니다. 이전과 같이 판단과 여러 가지의 행위가 일어나지만 그것은 기존의 나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에고가 없습니다. 의지 자체도 관찰의 대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간 순간 선택하여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 그리고 관찰을 해보시면 알겠지만 이 과정도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정하고 그에 대해서 어떠한 신호 혹은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 의문을 던지는 행위가 없이는 그 결과로 인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이 현재 물리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불확정성의 원리)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미 불교에서는 이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님이 말하는 "순수 관찰"이 스스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의식에 떠올리기 위해서는 조직적이고 목표를 가지는 의지를 발휘해서 다각도의 관찰 행위를 해야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행위와 ,그 반대의 행위의 관계로만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여기에 필연적으로 행위에 의한 왜곡이 반대의 행위에 부과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장님이 지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막대기로 땅을 치면서 걸어가는데 딱딱한 경우는 그대로 드러나지만 부드러운 경우는 치는 행위에 의해서 땅의 모양이 왜곡됩니다. 이러한 식으로 인간의 행위가 내부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매순간 이러한 요소들을 감안하여서 전체적으로 인지하고 행위를 선택하여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가 우리 인간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 열려있는 경우의 수가 유한하겠지만 아마 거의 무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