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1월 26일 금요일 오후 06시 19분 45초 제 목(Title): 임제록 示衆 임제선사는 무조건 할!만 한 게 아닙니다. ........................................................................... 임제록 시중(示衆) [Ⅱ] 2. 4조용(四照用) 대중에게 설하기를 "나는 어느 때는 먼저 비추고[照]나서 작용[用]하며 어느 때는 먼저 작용하고 나서 비추며,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기도 하며, 비춤과 작용을 모두 하지 않기도 한다. 먼저 비추고 나서 작용하는 것은 주관[人]의 경우이고 먼저 작용하고 나서 비추는 것은 대상[法]의 경우이다.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경우는 밭가는 농부의 소를 몰고 가버리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은 격으로서, 뼈를 두드려 골수를 뽑아내고 침으로 아프게 찌르는 일이다. 비춤과 작용을 모두 하지 않는 경우는 물음도 있고 대답도 있으며, 주객을 모두 인정하여 물과 진흙이 섞이듯 근기에 따라 중생을 지도하는 것이다. 테두리를 벗어난 대근기라면 떠보기도 전에 재빨리 일어나서 갈 것이니, 이래야만 조금은 되었다 하겠다.” 3. 일 없음이 귀한 사람이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납자들이여! 참으로 바른 안목을 얻어서 천하를 이리저리 다니더라도 이 같은 도깨비들에게 홀리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일 없는 것이 귀한 사람이니, 일부러 조작하지 말고 평상그대로 하면 될 뿐이다. 그대들은 바깥에서 곁으로 허둥대고 찾으려 하나 벌써 틀렸다. 부처를 구하려 하나 부처란 이름일 뿐이다. 그대들은 내달려 구하는 그것을 아느냐? 시방삼세 부처님과 조사들도 오로지 법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나오셨고, 지금 참구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도 법을 구하기 위할 뿐이니, 법을 얻어야 비로소 끝나고 얻지 못하면 예전대로 다섯 갈래의 길에 떨어져 윤회한다. 무엇이 법인가? 법이란 마음법을 말한다. 마음법은 형상이 없어서 온 시방법계를 꿰뚫어 눈앞에 그대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철저하게 믿지 못하고서 다만 명칭과 개념을 그것으로 착각한다. 그리하여 문자 속에서 부처다 법이다 하며 알음알이로 찾고 헤아려 천지차이로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법을 말할 때 무슨 법을 말하는가? 마음자리의 법[心地法]을 말한다. 그것은 범(凡)에도 들어가고 성(聖)에도 들어가며, 깨끗함에도 들어가고 더러움에도 들어가며, 진리에도 들어가고 세속에도 들어간다. 그러나 너희는 진·속·범·성이 아니기에 모든 진·속·범·성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것이지, 진·속·범·성이 이 사람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니다. 잡았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하니, 그것을 일컬어 깊은 뜻[玄旨]이라고 한다. 나의 법문은 천하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 가령 문수·보현이 와서 바로 눈앞에 각기 몸을 나투어 법을 묻는 경우 '화상께 묻습니다'하자마자 나는 벌써 알아차려 버린다. 또 그저 편안히 앉아 있는데 한 납자가 찾아와 만나볼 때도 나는 다 알아차리고 만다. 어째서 그런가? 나의 견처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밖으로는 범이다 성이다 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안으로는 근본자리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꿰뚫어 보아서 다시는 의심하거나 잘못되지 않기 때문이다. 4. 佛法은 평상 그대로이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 법은 애써 공부할 것이 없고 그저 평상대로 아무 일 없는 것이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이는 알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밖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은 도대체가 바보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공이 되기만 한다면 선 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되어서 경계가 다가온다 하여도 그대들을 어지럽히지 못한다. 설령 묵은 습기(習氣)와 5무간죄의 업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큰 해탈 바다가 되는 것이다. 요즈음 공부하는 이들은 도대체 법을 모른다. 마치 양(羊)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접어 넣는 것처럼, 머슴인지 주인인지 가리지 못하고 나그네인지 주인인지 구분치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에 들어왔으므로 번잡스런 곳에는 들어가지 못하니, 어찌 진정한 출가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꼼짝없는 중생일 뿐이다.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평상 그대로의 바른 안목을 잘 가려 내야 한다. 그리하여 부처와 마구니를 구분하고 참됨과 거짓을 구분하며, 범(凡)과 성(聖)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가려낼 수 있다면 참된 출가라고 할 것이지만, 부처와 마구니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저 한 집에서 나와 또 다른 집으로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이는 업을 짓는 중생이지 진정한 출가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지금 부처와 마구니가 한 몸이어서 물과 우유가 섞여 있듯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거위왕이 우유만을 먹듯이, 눈 밝은 도인(道人)이라면 마구니와 부처를 함께 쳐버린다. 그대들이 만약 성(聖)을 좋아하고 범(凡)을 싫어한다면 생사 바다에서 떴다 잠기곤 할 것이다. 5. 부처와 마구니 무엇이 부처이고 무엇이 마구니입니까? 그대가 의심하는 그 한 생각이 마구니이며, 그대가 만법이 나지 않고[無生] 마음은 허깨비라는 것을 알면 다시는 한 티끌 한 법도 없어서 어딜가나 청정하게 되니, 그것이 부처이다. 그러나 부처와 마구니란 깨끗함과 물듬의 두 가지 경계이다. 내가 보기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어서 깨치면 그만일 뿐, 오랜 세월을 거치지 않는다. 닦을 것도 깨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어서 어느 때이든 다른 어떤 법도 없는 것이다. 설사 이보다 더 나은 법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꿈 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전부이다. 지금 바로 눈앞에서 호젓이 밝고 역력하게 듣고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걸림이 없고 시방법계를 꿰뚫어 3계에 자유자재하니 온갖 차별된 경계에 들어가도 휘말리지 않는다. 한 찰나에 법계를 뚫고 들어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말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말하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말하고, 아귀를 만나면 아귀를 말한다. 어느 국토를 가든지 거기에 노닐면서 중생을 교화하나 단 한번도 일념(一念)을 떠난 적 없고 곳곳마다 청정하여 시방법계에 빛이 사무치니 만법이 한결같다. 대장부가 본래 아무 일 없는 줄을 오늘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다만 그대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생각생각 내달려 구하면서 자기 머리는 놔두고 다른 머리를 찾아 스스로 쉬지를 못한다. 예컨대 원돈교(圓頓敎)의 보살들은 법계에 들어 몸을 나투고 정토에서는 범(凡)을 싫어하고 성(聖)을 좋아한다. 이러한 무리들은 갖고 버리는 것을 잊지 못하고 물들었다느니 깨끗하다느니 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종의 견해는 그렇지 않아서 바로 지금일 뿐 다른 시절이란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가 병에 따라 약을 쓰는 일회적인 치료일 뿐 실다운 법이라고는 전혀 없다. 만약 이렇게 볼 수만 있다면 참된 출가여서 하루에 만냥 황금을 쓸 것이다. 납자들이여! 경박스럽게 제방의 장로들에게 인가를 받아 가지고 '나는 禪을 알고 道를 안다'고 나불거리지 말라. 그가 비록 폭포수처럼 말솜씨가 유창하다 하더라도 이는 모두 지옥행 업을 짓는 것이다. 진정한 납자라면 세간의 허물을 구할 것이 아니라 바른 안목을 구하는 일이 절박하다. 바른 견해를 통달하여 뚜렷이 밝다면 바야흐로 일을 다 마쳤다 하리라. 6. 의지함 없는 도인[無依道人] 무엇이 바른 견해입니까? 그대들은 범(凡)에 들어가고 성(聖)에 들어가며, 물듬에 들어가고 깨끗함에 들어가며, 모든 부처님 나라에 들어가고 미륵의 누각에 들어가며 바로자나불의 법계에 들어가는데 그때마다 국토를 나투어서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한다.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출현하시어 큰 법륜을 굴리시고 다시 열반에 드시지만 가고 오는 모양을 보지 못하니, 거기서는 나고 죽음을 찾아 볼 수 없다. 문득 남이 없는 법계에 들어가 온갖 나라들에 곳곳마다 노닐면서 화장세계에 들어가 모든 법이 다 빈 모양으로서 전혀 실다운 법이 없음을 본다. 그런데 유독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법문을 듣고 있는 도인이 있으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다. 이렇게 부처는 의지할 것 없는 데서 생겨나므로 만약 의지할 것 없음을 깨닫는다면 부처라는 것도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보게 된다면 이야말로 바른 견해이니라. 道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명칭과 의미에 집착하여 저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이름에 구애되므로 도안(道眼)이 막혀 분명히 알지 못한다. 저 l2분교란 모두가 이치를 드러내는 말인데 공부하는 사람들 이를 알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명칭이나 개념에다가 알음알이를 낸다. 이는 모두가 어디에 기댄 것이라서 인과에 떨어져 3계 생사윤회를 면하지 못한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나고 죽음과 가고 머무름을 벗어나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당장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알도록 하라. 모양도 없고 뿌리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이 활발하게 살아 움직인다. 수만 가지로 응용을 하지만 그 응용에는 정해진 곳이 없다. 그러므로 찾을수록 멀어지고 구할수록 어긋나니, 그것을 '비밀'이라고 부른다. 납자들아! 그대들은 꿈 같고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잘못 알지 말라, 그 몸은 머지않아 덧없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들은 이 세계 속에서 무엇을 해탈이라고 찾는가? 그저 한술 찾아 먹고 누더기 꿰매며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선지식을 찾아 뵙도록 해야지 쾌락이나 쫓아 그럭저럭 지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촌음(寸陰)을 아껴야 하니 생각생각 덧없이 흘러가 거칠게는 지수화풍 4대(四大)에, 미세하게는 생주이멸 사상(四相)에 녹여들게 된다. 부디 지금 이 순간 모양 없는 네 가지 경계를 잘 알아서 저 경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여라. 7. 모양없는 네 경계 무엇이 모양 없는 네 가지 경계입니까? 그대들이 한 생각 의심하는 마음이 흙[地]이 되어 가로막히고, 한 생각 좋아하는 마음이 물[水]이 되어 빠지며,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불[火]이 되어 타고, 한 생각 기뻐하는 마음이 바람[風]이 되어 나부끼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알아낼 수 있다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경계를 활용할 것이다. 동쪽에서 솟았다가 서쪽에서 꺼지며, 남쪽에서 솟았다가 북쪽에서 꺼지고, 가운데서 솟았다가 가에서 꺼지며, 가에서 솟았다가 가운데서 꺼져서 땅 밟듯 물을 밟고 물 밟듯 땅을 밟는다. 어째서 그런가? 4대가 꿈 같고 허깨비 같은 줄 통달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납자들이여!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4대가 아니라 그 4대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그것이다. 이렇게 볼 수만 있다면 가고 머물고에 자유자재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꺼려할 법이라곤 없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을 좋아한다면 그때 성인은 성인이라는 이름일 뿐이다. 어떤 납자들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확실히 틀린 얘기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문수를 알고자 하는가? 그대들 눈앞에 작용하는 그것,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딜 가든지 의심할 것 없는 이것이 산 문수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 차별 없는 빛은 어디에나 두루한 진짜 보현이요, 그대들의 한생각 마음이 스스로 결박을 풀 줄 알아서 어딜 가나 해탈이니 이것이 관음의 삼매법이다. 서로 주인도 되고 짝도 되어 나올 때는 한꺼번에 나오니, 하나가 셋이고 셋이 하나이다.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비로소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보는 것이다. 8. 어디서나 주인공 임제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도 배우는 이들은 이제 스스로를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밖으로 찾지를 말라. 모두가 저 부질없는 6진 경계를 반연하여 도무지 삿되고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조사니 부처니 하는 것은 모두가 부처님 가르침의 자취 가운데 일일뿐이다. 어떤 사람이 속으로든 겉으로는 한 마디 꺼내면 곧바로 의심을 내어 이리저리 생각해 보고 옆 사람을 찾아가 물으며 몹시도 정신없이 서둔다. 대장부라면 그렇게 주인이니 도적이니, 옳거니 그르거니, 색이니 재물이니 하며 쓸데없는 이야기로 날을 보내지 말라. 나는 승·속을 논하지 않고 찾아오는 자가 있으면 다 알아내 버리고 만다. 어디서 오든 간에 그것은 소리나 명칭 개념따위일 뿐이어서 모두 꿈이나 허깨비이고 경계를 타고 나타나는 사람의 진면목을 보게 되나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깊은 뜻이다. 부처님의 경계가 "나는 부처의 경계이다"라고 자칭하지는 못할 것이요, 도리어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 경계를 타고 나타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나에게 부처되는 길을 묻는다면 나는 청정한 경계로 응대해 주고, 어떤 사람이 나에게 보살을 묻는다면 나는 곧 자비의 경계로 응대해 주며, 보리를 묻는다면 깨끗하고 오묘한 경계로 응대해 주고, 열반을 묻는다면 고요[寂靜]한 경계로 응대해 준다. 경계는 수만 가지로 차별되나 사람에는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나투는 것은 물 속에 비친 달과 같다. 납자들아! 그대들이 진여법을 깨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대장부라야 한다. 시들시들 나약하게 흐느적거려서는 안되니, 깨진 그릇에는 제호(醍호)를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큰 그릇이라면 남에게 홀리지 않고 어딜 가나 주인공이 되어 선 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찾아오는 자가 있거든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대들이 한 생각 의심하면 곧 마구니가 마음속으로 들어오니, 보살이 의심을 낼 때 생사의 마구니가 틈을 타는 것이다. 다만 생각을 쉬면 될 뿐 다시 바깥으로 구하지 말고 사물이 다가오면 오는대로 관조하도록 하라. 그대들이 지금 바로 작용하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3계를 내고 경계 따라 반연하여 6진 경계로 나뉘게 되니 그대들이 지금 응용하는 곳에 무슨 모자람이 있겠느냐. 한 찰나에 그대로 정토(淨土)에도 들어가고 예토(穢土)에도 들어가며, 미륵누각에도 들어가고 3안국토(三眼國土)에도 들어가서, 가는 곳마다 노니나니 오로지 빈 이름임을 볼뿐이다. 9. 3안국토(三眼國土) 무엇이 3안국토입니까? 나는 그대들과 함께 깨끗하고 묘한 국토에 들어가 청정한 옷을 입고 법신불을 말하며, 차별 없는 국토에 들어가 차별 없는 옷을 입고 보신불을 말하며, 해탈국토에 들어가 광명의 옷을 입고 화신불을 말한다. 이 3안국토란 모두가 의지하여 변한[依變]것이다. 교학자들은 법신을 근본으로 하고 보신·화신을 그 활용[用]이라 하나 내가 보기에는 법신이란 설법할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의미에 입각하여 법신을 말하고, 바탕에 입각하여 국토를 논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법성신과 법성토가 의지하여 통한[依通]국토이니 빈주먹에 누런 잎사귀를 쥐고 돈이라고 속여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임을 분명히 알겠다. 찔레와 마른 가시와 마른 뼈다귀에서 무슨 즙(汁)을 찾느냐. 마음밖에는 법이 없고 마음 안에서도 찾을 수 없으니 무엇을 찾겠느냐. 그대들 제방에서는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고 하는데 착각하지 말라. 설령 닦아 깨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다. 그대들은 6도 만행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말하나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업을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도 업을 짓는 것이며, 경을 보고 논을 보는 것 역시 업을 짓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는 일없는 사람이며 유루유위(有漏有爲)와 무루무위(無漏無爲)가 청정한 업이다. 어떤 눈 먼 중들은 배불리 먹고는 좌선하여 관법을 닦는다고 한다. 그들은 생각이 새나가는 것을 꽉 붙들어 달아나지 못하게 하면서 시끄러운 것은 싫어하고 조용한 것만을 찾는데 그것은 외도법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만약 <마음에 머물러 고요함을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관조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정(定)에 든다>*면 이러한 무리들은 모두가 조작을 하는 것이다"고 하셨다. 지금 이렇게 법문을 듣는 그대들이 어떻게 저것을 수행하고 증득하며 장엄하려 하겠느냐. 저것은 닦을 물건도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만약 그것을 장엄하게 된다면 무엇이든지 장엄할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잘못 알지 말라. * <주심간정 거심외조 섭심내징 응심입정(住心看靜 擧心外照 攝心內澄 凝心入定): 이 네 구절은 북종(北宗) 신수계(神秀系)에서 학인을 가르치는 표어로서, 하택(荷澤)스님이 인용하여 북종을 공박한 말이다.> 납자들아, 그대들은 어떤 노스님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는 그것이 참된 도라고 하여 선지식은 불가사의하고 나는 범부의 마음이므로 감히 저 노스님의 뜻을 헤아려 볼 수 없다고 한다. 이 눈 먼 바보들아! 일생을 이러한 생각만을 내어서는 멀쩡한 두 눈을 저버리는 것이며 싸늘하게 입 다문 모습이 마치 빙판 위에 서 있는 나귀새끼 같을 뿐이다. 나는 감히 선지식을 비방하여 구업(口業)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큰 선지식이라야만 비로소 감히 부처와 조사를 비방하고 천하를 옳다 그르다 하며 3장(三藏)의 가르침을 물리치며, 어린애 같은 모든 무리들을 꾸짖으면서 맞고 거슬리는 경계 속에서 사람을 찾는다. 그러나 나는 12년동안 업의 성품을 찾았는데도 겨자씨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새색시 같은 선사(禪師)라면 절에서 쫓겨나서 밥도 못 얻어먹을까 두려워하여 늘 불안하고 즐겁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대선사(大禪師)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믿어주지 않아 쫓겨나는 일이 빈번한데 그것이 비로소 귀한 것이다. 만약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인정해 준다면 이런 사람은 아무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사자의 포효 한 번에 여우는 머리통이 찢어지는 것이다. 납자들이여! 제방에서는 닦을 도가 있고 깨칠 법이 있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치며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슨 모자람이 있으며 어떤 점을 보완한다는 것인가. 나이 어린 후학들이 잘 모르고 이들 여우 도깨비들이 하는 말을 믿는다. 그리하여 사리를 설명하여 다른 사람들을 얽어매고는 "이치와 수행이 부합하고 3업을 잘 지켜야만 성불할 수 있다"는 말을 하도록 허락해 버리는데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길에서 도에 통달한 사람을 만나거든 무엇보다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만약 누구라도 도를 닦는다면 도를 행함이 아니니 수만 가지 삿된 경계들이 앞 다투어 생겨난다. 지혜의 칼을 뽑아 들면 아무 것도 없어져서 밝음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어둠이 밝아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하였다. 무엇을 찾느냐? 지금 바로 눈앞에 법문을 듣는 의지함이 없는 도인은 너무도 분명하여 결코 부족한 적이 없었다. 그대들이 만약 조사나 부처와 다름없기를 바란다면 이렇게 보면 될 뿐이니 의심하여 잘못되지 말라. 그대들의 마음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산 조사라고 하니 마음에 다름이 있으면 성품과 모양이 다르지만 마음이 다르지 않으므로 성품과 모양이 다르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