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Gilles) <staff5.postech.a> 날 짜 (Date): 2000년 9월 15일 금요일 오후 10시 14분 48초 제 목(Title): Re: 김용옥의 도교선전을 보니 고구려멸망이 >불교계엔 김용옥과 논쟁할 자가 없는가 ? 이 보드 1561번에 좋은 글이 있더군요. 관심있어 하실 것 같아서 글을 펍니다. ps. 그래도 도교때문에 고구려가 망했다는 건 이해가 좀 안되는데요. -_-;; =======================================================================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8년03월04일(수) 11시23분07초 ROK 제 목(Title): 달마의 무식, 양무제의 유식 달마의 "모른다"와 양무제의 "모른다" 신동아의 김용옥 교수의 벽암록 강의를 보면 쓴 웃음이 나 옵니다. 자신은 전혀 감동된 바가 없이, 남을 감동시키겠 다는 지식과 기교의 무지 그리고 자신의 지식과 기교에 속 은 대중에게서 또 다시 자신을 합리화. 그의 종교 글은 언제나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도 불교도 참으로 훌륭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 교는 아닙니다. 지금의 불교도 아닙니다. 지금은 김용옥 입니다" 신문에 그의 글이 나올 때 마다 그는 유식(有識)하지만 무 지(無知)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김용옥 교수의 벽암록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종교는 감동이 생명입니다. 벽암록은 종교적 감동입니다. 벽암록은 감동없는 지식, 허물어진 바 없는 진리에 대한 집착성을 거부합니다. 김용옥 교수는 한번도 감동해 본 적 이 없습니다. 그는 한번도 허물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본적이 없는 감동을 남에게 일으키기 위하여 어 쩔 수 없이 현란한 그의 지식을 동원할 수 밖에 없고 좌충 우돌 정신없이 자신을 지식으로 치장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매한 지식인들은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극을 달 리는 그에게서 안도하고 동질감을 느끼면서 벽암록과는 점 점 멀어지는 벽암록을 듣게 되면서 양무제인 김용옥 교수 를 따라서 양무제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양무제가 곧 김용옥 교수와 똑 같습니다. 양무제가 달마조사에게 물은 성스러운 진리의 가장 높은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달마조사가 답한 것은 성스 럽지 않은 것이 성스러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여기 있는 성스러운 달마는 누구란 말이냐고 물었을 때에 달마 조사가 말한 "모른다(不識)"는 곧 "무식(無識)"을 말합니 다. 지공 스님이 양무제에게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라 고 물었을 때에 양무제가 답한 " 모른다(不識)"는 곧 "무 지(無知)"를 말합니다. 벽암록 제1칙은 유식은 무식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고 이성은 감동에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고 세움은 무너짊 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김용옥 교수는 참으로 유식합니다. 양무제도 김용옥 교수 이상으로 유식한 사람입니다. 불교와 각종 학문에 뛰어난 재주와 암기력과 그리고 사람을 자기에게 끌어드리는 남다 른 재주를 가지고 있는 면에서 양무제와 김용옥 교수는 너 무나도 유사합니다. 김용옥 교수의 벽암록 강의는 넌센스입니다. 양무제가 달 마를 앞에 두어도 그 달마는 양무제일 뿐이라 양무제가 벽 암록 제1측을 강의하는 것은 양무제가 양무제를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는 것이라서 달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 다. 그의 지식은 다시 달마를 양무제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양무제는 붇다를 양무제화 하였고 그 점을 지적하는 달마 를 다시 양무제화 할 뿐입니다. 달마 조사는 무식합니다. 그러나 무지하지 않습니다. 그리 고 달마 조사는 종교적 감동속에 푹 파뭏혀 있습니다. 그 는 성스러움이 성스러움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의 가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부처님의 감동은 달마조사를 무너트렸고 허물어진 달마조사에게는 성과 속이라는 망상 은 감동의 불길에 의하여 소멸되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 은 태울 수가 없는 불길의 근원인 부처님의 소멸되지 않는 서원 자체입니다. 양무제는 유식합니다. 그러나 그는 무지합니다. 그는 부처 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처님 그 자체에 대하여는 조금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는 부처님에게 자신을 치장할 수 있는 방법과 자신을 합 리화시키고 자신의 정치와 인생과 철학을 인테리어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척 많다는 것을 발견하는 천재적인 지식인 입니다. 그런데 그는 부처님에게 참답게 감동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부처님께 무너져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라는 이름과 부처님의 교설로 자신을 더욱 공고히 하였습니다. 나 양무제는 부처님의 교설을 이렇게 많이 알고 있다. 나 는 유식하다. 나 김용옥이는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다. 나는 유식하 다. 그렇지만 실로 양무제와 김용옥 교수는 둘 다 부처님 자체 에 대하여 전혀 감동한 바가 없습니다. 양무제는 부처님의 지식으로 자신을 인테리어하고 김용옥 교수는 부처님의 지 식과, 반 부처님의 지식의 양면을 적당히 사용하여 자신을 인테리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란한 지식으로 무지함을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란한 지식은 유식(有識)은 속여도 무식(無識)은 속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