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wwww (DD15러셀) 날 짜 (Date): 2000년 5월 6일 토요일 오전 02시 34분 25초 제 목(Title): 그대들은 모두 미쳤다 U.G. KRISHNAMURTI 그대들은 모두 미쳤다! G: 나는 연단에 앉아서 강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가설과 추상적인 개념들을 놓고 토론하는 것은 순전히 시간 낭비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사람이 한가하게 앉아서 분노에 대해 유쾌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그는 분기탱천한 상태이다. 그러니 그대가 위기에 처해 있으며 화가 나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대는 왜 분노에 대해 말하는가? 그대는 "언젠가는 더 이상 분노에 끄달리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겠지."하는 희망을 품고 살다가 죽는다. 그대는 희망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끙끙거리며 살아간다. 이 삶에서 영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그대는 다음 생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내생이라는 것은 없다. 문: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무런 위안도 지침도 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왜 떠들고 계시는 것입니까? U.G: 내가 뭘 어쨌단 말인가? 나는 그대가 와서 물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 뿐이다. 그대는 나를 비난하고 돌을 던지고 싶은가?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대는 철벽같은 방어막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것에도 영향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능력도 없다. 그저 사고 작용을 통해 반사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그대의 관념과 정신 작용 모두가 이런 반사 작용에 불과하다. 반사 작용이 곧 사고이다. 그대가 저기에서 겪었던 아픔은 실제적 고통이 없는 '여기'에도 뚜렷하게 반영된다. '여기'에는 아무 고통도 없는데 말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그대가 그들을 개인적으로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을 느낀다. 최근에 나의 맏아들이 근처의 병원에서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으며 나는 종종 그를 찾아갔다. 내 친구들은 그가 죽기까지 내가 내내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고통은 삶의 표현 양식이다. 친구들은 내가 아들의 암에 대해 어떤 치료책을 시도해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내가 종양을 건드리면 그 종양은 더 자라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에 생명력을 보태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암은 세포의 번식 현상이며, 삶의 또 다른 표현 양식이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하건 그것을 더 강화시킬 것이다. 문: 그렇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알면서도 그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씀입니까? U.G: 고통은 하나의 경험이지만 '여기'에는 아무 경험도 없다. 그대와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통합적인 움직임이며 흐름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흐름에 대해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오도된 것이다. 그대는 한 개인이 아니다. 그대는 개체가 아니다. 주변의 '외물'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통합적인 흐름은 그대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 하지만 경험이 배제된 삶이라는 것은 왠지 공허하게 들리는군요. U.G: 내가 말하는 내용이 그대의 논리적 구조와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렇게 들리는 것이다. 그대는 그 분열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상황의 전모이다. 그대의 질문은 다시 한번 사념에 불과하여 따라서 반사 작용일 뿐이다. 모든 사념은 반사 작용이다. 그대는 이 사념이라는 방어막을 기를 쓰고 사수하려 한다. 그러면서 삶의 흐름이 그대의 방어막 안으로 치고 들어올까봐 두려워 한다. 삶은 둑을 위협하며 거세게 밀려드는 강물과 같다. 그대의 사고 체계와 심리적 구조 체계에는 한계가 있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자유로운 삶이 육체에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폭발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육체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세포 하나 하나가 폭발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무서운 악몽을 꾼다해도 이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오도될 수밖에 이유이다. 문: 다른 구루와 종교 지도자들 또한 독립적인 별개의 실체는 없으며, 그런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우리 문제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르침과 당신의 말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U.G: 그대나 그들의 경우에 그것은 말일 뿐이다. 삶의 통합적 흐름에 대한 그대의 믿음은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며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대는 구루나 경전을 인용해서 교묘하게 합리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대의 신념 체계는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의 결과물이며, 모두가 이차적으로 인용된 것들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신념 체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대가 더할 수 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신념 체계와 환상이 무너지면 그대 또한 무너진다. 나의 말은 그대의 고통에 대한 반응, 질문과 논리적 주장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그 고통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문: 하지만 이렇게 당신이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에게 어떤 철학과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지 않습니까? 설령 상대방이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U.G: 터무니 없는 소리! 여기 이 자리에는 말하는 자도 없고, 충고하는 자도 없고, 고통을 느끼는 자도 없고, 무엇을 경험하는 자도 없다. 공을 벽에 던지면 튀어나온다. 그것이 이 상황의 전모이다. 나의 말들은 그대의 질문이 낳은 직접적인 산물일 뿐이다. 내 쪽에서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은밀하게 타협할 것도 없고, 팔 물건도 없고, 날을 세울 도끼도 없고, 아무 것도 증명할 것이 없다. 문: 하지만 육체는 덧없는 것이며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 영원불멸하는 것을 열망합니다. 그러니 더 고차원적인 철학이나 종교, 영적인 것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U.G: 육체는 영원불멸한다. 다만 임상적인 죽음을 거치면서 형상이 바뀔 뿐, 새로운 모습을 하고 언제나 삶의 흐름 안에 남아 있다. 육체는 '내생'이나 그런 따위의 영원성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육체는 지금 이 순간에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며 자신을 번식시킨다. '저 너머'라는 허구적인 개념은 우리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개념이 진실로 원하는 바는 동일한 것을 형태만 수정하여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것이다. 동일한 것을 반복하고자 하는 욕구가 곧 영원불멸에 대한 열망이다. 이런 불멸성은 육체에게 아주 낯선 것이다. 불멸을 추구하는 사념의 욕구가 육체를 질식시키고 올바른 인식을 방해한다. 사념은 자신을 사념 자체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보호자일뿐만 아니라 육체의 지속성까지 책임지는 보호자로 착각한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 모두 허구이다. 문: 무엇인가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의지의 개입이 없다면...... U.G: 만일 그대의 의지를 통하지 않고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이때에는 그것으로 끝이다. 그것을 중단시킬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을 통과해 가야 하리라. 이것은 그대처럼 실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는 좋은 일이 아니다. 의문, 목적 의식, 신념 체계, 가설들, 그대가 벗어나야 할 것은 실체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다. 목적을 포기하는 순간, 지금 그대가 제기하고 있는 허무맹랑한 의문들 또한 사라질 것이다. 의문과 목적 의식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존립하지 못한다. 문: 그런 식의 말씀은 너무 살벌하군요. 우리는 망각이나 완전한 소멸 따위가 두렵습니다. U.G: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다. 이 때에는 가라앉는데 대한 두려움의 문제는 없다. 그러나 내가 보장한다고 해서 그대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나는 무력하다. 그대는 여전히 지금과 같은 일들을 계속할 것이다. 만일 영원히 지속하고자 하는 희망과 욕망에서 비롯된 일들을 그만둔다면 그대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정처없이 표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틀림없이 어떤 길이 있을 것이다. 아마 내가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처지에 바진 것이야."하는 희망을 간직하겠지.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에 의존하고자 하는 이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절망적인 상태를 솔직히 인정하고 직면해야 한다. 문: 하지만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습니다. U.G: 그대의 문제가 지속되는 이유는 바로 그대가 만들어낸 해결책 때문이다. 해답이 없다면 질문도 있을 수 없다. 해답과 질문은 상호 의존적이다. 그대의 문제와 해결책은 항상 병행한다. 그대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해답을 사용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대의 문제가 지속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위 성자라는 사람들, 심리학자들, 정치가들이 무수한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진정으로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만일 타당한 해답이 있었다면 문제도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하는 일이란 더 열심히 수행하고 명상하라거나, 물구나무 서기를 하라는 등 그대를 다그치는 것 뿐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소위 정신적 스승이나 지도자라는 자들은 모두 가짜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해결책도 가짜다. 그런 자들은 정직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다만 겉만 번지르한 가짜 상품을 파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만일 그대의 희망과 두려움을 잠시 접어두고 이 자들을 사업가로 본다면 그대는 지금까지 그대가 원했던 상품 중에서 아무 것도 배달해 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이 전문가들이 파는 가짜 상품들을 계속 사들이고 있다. 문: 그러나 이 분야는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깨달음과 지혜를 얻기 위해 헌신하고 수행해온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U.G: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철학을 지녔다해도 몸 자체의 본원적 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이 정신적 활동, 영적인 작용, 정서적 활동, 느낌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하나의 통합적인 흐름에 기초한다. 이 몸은 더할 나위없이 지성적이기 때문에 그런 부류의 과학적, 신학적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대가 삶과 죽음, 자유 등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공상적 장식품들을 버려라. 그러면 몸은 방해받지 않고 아주 조화롭게 작용한다. 몸은 그대나 나의 도움이 필요없다. 그대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몸이 조화롭게 기능한다면 그대는 이렇게 불멸성, 내생, 즉음 따위에 대해 어리석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몸은 영원불멸한다. 문: 당신은 이렇게 불행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을 조금도 남겨두지 않고 무자비하게 쳐 버리시는군요. 결국 남는 것은 자기 파괴밖에 없는 것 같은데 자살을 해버릴까요? U.G: 자살해도 소용없다! 자살 후에 몸이 해체되는 것은 다른 형태를 갖고 이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이다. 결국 끝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삶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시체는 배고픈 개미들을 먹여살리고 좋은 거름이 된다. 다른 생명체를 위한 영양분이 되는 것이다. 그대는 삶을 끝낼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몸은 영원불멸하므로 "과연 불멸성이라는 것이 있습니까?"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특정한 형태의 몸이 종말을 고하는 것은 다만 다른 형태를 갖고 지속하기 위함이다. 몸은 이것을 안다. 내생에 관한 의문은 두려움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그대에게 영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자들, 소위 영적인 지도자하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내생에 대한 그대의 기대와 두려움은 곧 그들의 생계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처럼 누군가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인간의 미래에 대해 진정한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알량한 미래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몇 시간씩 인류의 미래와 자비에 대해 논하는 것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행동일 뿐이다. 진실로 그대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대 자신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생이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유치한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문: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삶은 두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고, 환경을 보존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U.G: 그대들 모두는 정신병자이다. 그대는 생명의 소중함이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산아제한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폭탄을 투하하고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터무니없는 수작이다. 그대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동시에 전쟁과 기아, 가난, 테러리즘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사실, 생명에 대한 그대의 관심은 정치적 이슈를 만들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그것은 공허한 학술적 토론일 뿐이다. 나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없다. 문: 물론, 그런 줄은 알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관심을 쏟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을 단순히 이기심의 발로라고 몰아부칠 수는 없습니다! U.G: 정녕 그런가? 그대가 진정으로 인류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있는가? 그대가 이렇게 분노를 표현하고 정의감과 관심을 내세워도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 모든 것은 그저 의례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대는 한가하게 앉아서 입으로만 떠들고 있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대는 조금도 분노하고 있지 않다. 만일 이 순간에 그대가 진정으로 분노했다면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 자신에게조차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여기에 앉아서 끝도 없이 분노에 대해 떠들고 있다. 분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떠들지 않는다. 몸은 분노를 흡수함으로써 이미 분노에 적합하게 행동한 것이다. 분노가 불처럼 타오르다가 사라진다. 그대가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몸이 그 분노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만일 내 말이 너무 심해서 그대를 절망시킨다면 앞으로는 절대 성자를 찾아가지 말라. 그보다는 피임약이나 그런 분야에 몰두할 일이지, 성스러움을 내세운 비지니스가 그대에게 도움을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말라. 그것은 순전히 시간 낭비이다. 문: 당신의 말씀을 들으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가할 생각이 드는군요. U.G: 포기할 것을 갖고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틀렸다. 돈이나 생활의 필수적 요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정신병이다. 생활의 기본적 욕구조차 부정하는 것은 변태적 행위이다. 그대는 고행이 의식의 자각을 증진시키고 이런 자각을 더 행복해지는데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림없는 망상이다. 의식의 자각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컴퓨터처럼 행동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평온해질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자동 기계가 되어야 한다. 어떤 행동이 일어나기 전이든, 그 행동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든, 또는 그 행동이 일어난 후에도 결코 그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 문: 요가 수련이나 종교적 출가의 중요성, 또는 도덕 교육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인간은 기계 이상의 존재입니다! U.G: 도덕적, 정신적, 윤리적 가치 모두는 허구이다. 실용적인 길을 모색해온 심리학자들도 이제는 결국 벽에 부딪쳐서 영적인 사람들을 통해 해답을 구하고 있다. 이 심리학자들은 그릇된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해답은 이들로부터 나올 것이다. 성스러움을 가장한 부패한 전통에서가 아니라. 문: 이런 상황 전체가 우리를 참으로 절망스럽게 만드는군요. 사람들이 메시아나 마하트마, 예언자들에게 의존하는 것도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U.G.: 그 메시아라는 자들이 세상에 남긴 것이라곤 비참함밖에 없다. 현대의 메시아가 나타난다해도 그는 그대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도 하지 못하는 일을 어느 누가 하겠는가? 문: 구세주나 성자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면 "진리를 알아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을 따를 수 밖에 없겠군요. U.G: 진리는 하나의 흐름(movement)이다. 진리는 잡을 수도 없고, 담을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할 수도 없다. 그대가 잡는 순간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내게 있어서 진리란, 어떤 상황에서도 그대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확실한 점은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구루 비지니스(guru business)는 완전히 넌센스이다. 현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항상 그랬었다. 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그대의 성향이 성직자들의 배를 불려준다. 그대가 기본적인 욕구마저 부정하고 있는 한편에서는 소위 성자라고 하는 자들이 롤스로이스를 굴리고, 황제처럼 진수성찬을 차려먹고, 군주처럼 대접받는다. 이 '홀리 비지니스(the holy business)'는 타인들의 어리석음과 맹신을 토대로 번성한다. 마찬가지로, 정치가들 또한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토대로 배를 불린다. 세상 어디에서나 똑같다. 문: 당신은 항상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시는군요! 고전적인 용어로 한다면 '네티 네티(neti neti)의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경전, 구루, 권위 체계 등을 버리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까? U.G: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안내자로 스승이나 사원, 경전에 의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대는 항상 문제에 대한 치료책으로써 해답을 구하고 있다.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답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고통스럽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소용없다. 본래 그러하다. 문: 그러나 당신이 단순히 운명론자나 냉소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인간이 처한 상태를 그저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새로운 운명의 길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U.G: 그대의 문제에 대한 단 하나의 해결책은 죽음 뿐이다. 그대가 꿈꾸는 자유는 오직 죽음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결국 해탈을 얻게 되어 있다. 해탈은 항상 죽음의 전조인데, 모든 인간이 죽기 때문이다. 문: 시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서 죽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죽음은 심리학적이고 로맨틱한 죽음, 또한 추상적 의미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죽음, 즉 육체의 죽음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U.G: 그렇다. 그대가 죽으면 몸은 무력한 상태에 놓인다. 기능이 멈추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다시 자신을 새롭게 회생시킨다. 이것은 날마다 너무나 당연한 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내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그대에게 경고하건대, 그대가 목표로 하는 해탈이 진짜로 일어난다면 그대는 죽어버릴 것이다. 나는 신체적 죽음을 말한다. 해탈의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체적 죽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호흡조절이 기쁨을 준다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탐닉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숨을 너무 오래 참으면 그대는 질식해서 죽어버린다. 문: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자각해야겠군요. 죽음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고, 죽음을 로맨틱하고 신비적인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U.G: 그런 상태를 각성으로 충만한 명상적 상태로 묘사하는 것은 돼지 먹이가 될 음식 찌꺼기를 로맨틱하게 묘사하는 것과 같다. 각성? 이 얼마나 환상적인 속임수인가! 그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속임수이다. 걸음걸이 하나마다 자각하려고 하지 말라. 만일 그런 명상법을 시도한다면 그대의 자의식만 강화될 뿐이다. 그것은 아주 어색하고 보기 흉한 꼴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항해사가 있었다. 그는 '수동적 자각'에 대한 책을 읽고 이 방법을 수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방법을 행하다가 자신이 몰던 배를 좌초시킬뻔 했다. 걸음걸이는 자동적인 것이다. 만일 걸음걸이 하나마다 자각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러니 '명상적 걸음 걸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지 말라. 이미 상황은 충분히 나쁘다. 소위 명상적 상태란 이렇게 나쁜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문: 그러나 종교적이고 명상적인 모든 것들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U.G: 왜 안되는가?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로맨틱한 관념일 뿐이다. 내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한다해도 그것은 그대 탐구의 일부가 될 것이다. 즉, 더 로맨틱한 개념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나는 그대가 탐구를 계속할 수 있게 만드는 새롭고 더 월등한 방편을 제시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팔아먹을 상품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지치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행하는 것과 같은 탐구를 완전히 부정한다. 여기에서 그대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행운을 얻으려거든 다른 데에 가서 알아봐라. 문: 그러나 당신도 역시 인간이고, 인류에게 무엇인가 봉사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비록 그것이 단순히 동정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U.G: 그래? 누가 나를 구세주로 선출했는가? 세상에는 그대에게 봉사하기를 원하는 성자와 예언자, 구세주들이 수없이 많다. 왜 거기에 한 명을 더하려고 하는가? 예수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나를 따르라."하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오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내일 계속하는 것이 낫겠다. 문: 그렇게 하지요. U.G: Thank You. U.G. KRISHNAMURTI 그대 스스로 찾아라! 나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의미에서의 사상가(thinker)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나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들의 문제는 생각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생각을 통해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사상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이것이 내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이다. 동시에 나는 커뮤니케이션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커뮤니케이션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이 우스꽝스러운 길을 가고있는 것일까? 생각을 통해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일깨우는 것이 내 방식이다.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으며 이 고통이 끝나야 한다. 어떻게 이 고통을 끝낼 수 있을까? 내가 제안하는 바는 전통적인 접근 방식에 어긋난다. 인도와 서양의 종교적 접근 방식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같은 현대적 접근 방식에도 어긋난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거나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내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주된 목적은 그들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그들을 침묵의 상태로 밀어넣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그 침묵 안에서 무엇인가 가능해진다. 아니,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가 들으려고 한다. 그들은 확고한 신념과 사상을 갖고 와 주장을 평치고 나와 토론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문제에 대한 그들의 접근방식을 무산시킨다.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이다. 우리 모두는 마음에 대해 말한다. 종교적인 사상가들, 심리학자들 모두가 마음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내가 말하는 존재의 상태를 그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종교든, 과학이든, 심리학이든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대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다. 내가 묘사하고자 하는 존재의 상태에서는 아무 노력도 필요없다. 나는 그저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비추는 거울로써 이 자리에 존재한다. 어쨌든 인류는 그럭저럭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우주에는 절대로 오염되거나 더럽혀지지 않는 순수 의식, 절대적으로 청정무구한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이 의식은 그 궤도권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대 쪽에서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가 지구의 어느 구석에 앉아있다 할지라도 이 의식은 인류 전체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이 의식은 모든 곳에서 똑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경계선도 없고 한계도 없다. 그러므로 이 의식은 인류 전체의 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내가 소위 종교적 체험이라는 것을 일종의 '폭발'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폭발은 반드시 인류 전체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것을 측정할 수는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폭발의 영향을 받았는지 측정하고 산술적으로 통계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폭발의 영향은 아주 점진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을 요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의식이 무제한적으로 누구에게나 폭발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이 의식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을 조사하여 어떤 결과치를 산출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의식과 접촉했다고 해서 누구나 폭발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폭발은 백만 명 중에 한 사람에게만 일어날 정도로 희귀하다. 그가 무엇을 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없다. 그저 그런 폭발이 일어날 뿐이다. 그대는 이것을 하늘의 은총, 또는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U.G. KRISHNAMURTI 그대에게는 용기가 없다! 생각이 문제이다.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의 무능력때문이 아니다. 그대는 "나도 어쩔 수 없어."하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생각이 문제다. 고뇌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고뇌에 대한 생각이 문제다. 생각을 멈춰라. 그런데 그대는 생각을 멈출 수 있는가? 지금 그대는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또한 생각이다. 나는 그대에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하지 않는다. 생각이 그대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거기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스스로를 표현하게 하라.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것을 홀로 뇌두라. 그러면 제 스스로 작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생각을 통해 슬픔과 고뇌를 영속시킨다. 그대에게 잘못된 점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대는 용기가 없을 뿐이다. 그대에게 무엇이 있건 그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용기이다. 이것이 지성이다. "나는 지금 그대로의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이것이 용기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것은 장차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의 움직임이 바로 그대이다. 두 극단 사이의 영역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내게 친구가 없다고 해서 적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게 적이 없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나의 친구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니 친구도 없고 적도 없는 존재의 상태를 그대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대는 항상 이 쪽 극단에서 저 쪽 극단으로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한다. 이것이 사념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두 극단사이에 있다. 그대는 이런 극단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상상하지도 못한다. 문: 그렇다면 이런 사념의 움직임이 왜 이토록 자연스러운 것일까요? 답: 자연스럽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아주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대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그대는 이런 상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적도 없다.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그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대가 바로 사념이다. 그대는 사념의 움직임과 다르지 않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내면에서 작용하는 이 기계적 구조, 즉 사념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가령, 내가 그대에게 "이것이 길이다."라고 말한다고 하자. 이 말을 듣고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그대는 내가 말한 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이 지식과 부합되는 상태로 몰아간다. 그리고 "나는 신을 경험했다. 나는 진리를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신이 아니다. 그대 자신이 되는 용기. 그대는 욕망에 대해 아무 간섭도 하지 않고 가만히 놔둔 적이 없다. 이것이 삶이다. 욕망이 없다면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욕망에 간섭하면 할수록 이 욕망은 더 큰 괴로움을 초래한다. 그대가 항상 고통받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존재할 용기가 없다. 그대 자신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대 홀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출처:명상나라(http://z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