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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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2일 수요일 오전 08시 25분 23초
제 목(Title): 퍼온글/21세기 동아시아의 불교 


 
    <특집1> 한국불교의 잠재력과 미래
     
              21세기 동아시아의 불교 - 금세기의 반성에 붙여(1)
  
 
 
  
  
 
 
 신규탁
현 연세대 철학과 교수
연세대 철학과 졸업
일본 동경대학 중국철학과 문학박사
불교의 중국화: 규봉종밀의 자아이해를 중심으로
『선학사전』,『선사들이 가려는 세상』외 논저 다수.
  
 
 
  
  
 
 
  1. 머리말

  불교라는 인류의 지적 문화유산에는 그것이 담고 있는 사유나 논리의 보편적인 
영역이 있는가 하면, 또 그것이 전파된 지역에 따른 특수성이 있다. 보편은 언제나 
개별자의 특수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필자 자신의 입장은 접어 두더라도, 불교가 
역사 속에 자신을 전개시킨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불교를 신봉하는 입장이 아닌 연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인류 문화유산으로서 
불교는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왔는가를 살펴보는 데에 귀중한 재료가 
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20세기의 끝에서 금세기에 지식인들이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연구했는가라는 이른바 불교를 대하는 시각을 반성적으로 검토해 보려고 
한다. 지역적으로는 동북아시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진행된 불교 연구를 보려고 한다.
  그러기에 앞서 한,중,일을 그 내부에 포함하는 이른바 ‘동아시아’ 지역을 
단위로 하는 기존 지역문화 논의의 시야를 드러내 보려 한다. ‘동아시아’를 
단위로 하는 지역문화 논의는 이 지역의 특성에 따라 ‘유교’라는 문화개념이 
일찍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유교’와 '동아시아’라는 두 축을 
사이에 둔 동아시아론에 대한 필자의 분석에서 이야기의 시작을 삼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밝혀지겠지만, 동아시아논쟁의 저변에는 지(知)의 제국주의적인 사고가 
깔려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의 불교를 연구하는 기존의 시각도 이 
범위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는 지(知)의 제국주의적 사고에서 동아시아의 사상을 보았다면, 다가올 
21세기는 이런 잘못된 시각을 비판 극복하는 것에서 그 출발점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끝에서는 문제점을 적시해 볼 것이다.
  
 
 
  
 
2. 동아시아론

  우리는 그 동안 ‘유교와 20세기의 한국’ 또는 ‘유교와 자본주의’ 또는 
‘유교와 근대화’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을 들어왔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웠던 대만, 싱가포르, 한국, 일본이 여타의 지역에 비해 상대적인 
경제성장을 보이게 됨에 따라, 이 나라들을 하나의 지역 단위로 묶어서 이 지역의 
공통 기반을 추려 보려 했다. 그 과정에서 ‘유교’는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되었고, 이런 논의들을 우리는 동아시아론의 하나로 불 수 있다.
  ‘유교’를 매개로 오늘날의 동아시아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우리에게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든 아니면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든, 그리고 ‘유교’의 역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지식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동아시아론의 
연장선에서, ‘유교’의 자리를 빼고 그 자리에 다른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대치시켜 이 지역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서 ‘유교’ 대신 또는 그것을 
보완하는 것으로 ‘불교’를 고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런 맥락과는 
길을 달리한다. 필자는 이른바 동아시아론이 이 지역의 사상이나 문화를 설명하는 
데에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동아시아론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런 논의가 시작되었던 역사의 이면에는 
이데올로기적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논의는 실재의 역사적 
사실에도 근거하지 않았고, 이념적인 필요성에 의해 구성된 허구이므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에게 새삼스럽게 ‘아시아’의 어원과 그 말이 생기게 된 역사적인 
배경이나 우여곡절을 자세하게 논의할 여유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시아’라는 말은 ‘동양’이라는 말과 같이 서양이 붙여 준 개념이다. 
‘아시아’라는 말에 의해서 포괄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아시아’라고 부르지 않았다. 더구나 시골 내지는 변두리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오리엔트’의 번역어인 ‘동양’으로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불렀을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있는 여러 사회집단 또는 나라들 사이에 ‘아시아’ 내지는 
‘동양’이라는 공감대를 역사적으로 공유한 적이 없었다.
  ‘아시아’나 ‘동양’이라는 말은 이 지역의 소속원이 아닌 타인들에 의해서 
멸시감을 덧붙혀 부여되었다. 그 타인들이란 처음에는 당시 청나라를 괴롭혔던 
유럽이었고, 그 후에는 한반도와 대만 그리고 중국 대륙을 괴롭혔던 일본이었다.
  유럽에서는 이 지역의 낙후성을 지적하고 이 낙후성을 자기네가 계발시켜준다는 
계몽주의적 개발 논리는 이미 헤겔과 막스 베버가 잘 보여준다. 그들은 표현은 
각각 달랐지만, 중국은 계속되는 왕조사의 변천만 있었지 그 속에서 개인의 인권 
성장이 과연 존재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러한 추궁에는 유럽 역사를 보편사로 
확정하고, 지구상에 있는 다양한 여러 역사를 하나의 자루 속에 처넣으려는 무지가 
깔려 있다. 때로 이 무지는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일본의 경우는 서구 열강과 아시아 침략의 경쟁과정에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엄청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었다.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이 당시에 이 지역을 침략해 오니, 이 지역 사람들이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저들을 물리치고 공동의 번영을 누리자는 말이었다. 이런 이데올로기 
만들기와 퍼트리기에 많은 학자들이 동원되었다. 불교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도학파라 불리는 니시다 기타로가 그랬고, 선불교 연구자 스즈끼 다이세쯔도 
그랬다. 거기에는 당시 한국의 승려들도 힘을 보탰다. 선불교학자로 서양에 알려진 
스즈끼 다시세쯔는 「신종교론」에서 청일전쟁을 이렇게 쓰고 있다.
  
 
 
  
 
   “폭국(청나라)이 우리들의 상업을 계속 방해하고 우리들의 권리를 유린하여 
인류 전체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이들을 복종케 해야지 
야수와 같은 그들을 어찌 자비심으로만 대응하리요. 이번 일청전쟁은 단지 정의를 
위해서 부정을 징벌하기 위한 것일 뿐 어찌 우리가 따로 구하는 것이 있으리요. 
이는 바로 종교적 거동일 뿐이다.”

  당시의 청일전쟁을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 아닌 종교적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는 
것이다. 스즈끼의 말에 따르면 이 전쟁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 폭국 청나라를 
응징하는 종교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많은 불교학자들이 불교사상을 
제국주의 침략의 무기로 써먹었다. 그것은 불교의 정신에 위반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사례를 말하려면 끝이 없다. 선불교학자 이시다 고꾸류는 『대승선』이라는 
잡지에서 「대동아 전쟁과 선(禪)」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禪)과 전(戰)에 공통된 것은 단(單)이다. 단(單)은 한겹, 하나, 
오직이란 뜻이다. 어떤 경우에도 두 개의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어떤 
경우에도 오직 하나이다. 일억일심(一億一心)이다. 일억일심으로 돌아가 
인과필연을 선용하는 선(禪)은 대동아 전쟁의 필승인 것이다.” 이게 선불교의 
정신이라고 하면 지금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런 논리가 통용되었다. 웃을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우리는 동아시아론의 불순성을 역사적으로 경험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피로 
치렀다. 물론 그 피 흘림은 일본 사람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 앞에 당시의 청나라도 많은 피를 흘렸다. 서양이 붙여 준 
‘동아시아’ 지역 사람은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까지 유사이래 가장 큰 
변화를 격어야만 했다.


3. 지(知)의 제국주의와 유교 자본주의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라면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중반 사이에 전개되었던 
동아시아론이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는 필자의 주장을 
독자들께서는 어느 정도 동감하실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닌, 1970년대를 전후로 
일었던 유교문화를 매개로 한 동아시아 근대화론이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필자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말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동아시아론이 군사력까지 동원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아시아론은 지(知)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선상에 있다는 점이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는 대만, 싱가포르, 한국, 일본의 네 나라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룩한 눈부신 경제성장의 배경에는 유교문화라는 공동의 기반이 
있었다는 주장을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로 국내에 
많이 알려진 사람은 일본 동경대학 중국철학과의 미소구찌 교수와 미국 하바드대학 
옌찡연구소의 중국계 학자 뚜웨이밍 교수를 들 수 있겠다. 이런 논의의 시발은 
물론 대만에서 이른바 신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쯤 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러면 위에서 거론된 학자들을 포함하여 이 
논의에 가담하여 그 내용을 풍부하게 했던 국내외의 학자들이 지(知)의 제국주의를 
옹호한 사람이란 말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오해의 틈을 없애기 위해 필자가 말하는 지(知)의 제국주의란 의미를 먼저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한 지역의 지식이 여타의 지역에 일방적으로 
침투되어 그 지역에서 압도적인 힘을 휘두를 때 필자는 이것을 지(知)의 
제국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것은 어느 한 국가의 힘이 주변의 다른 국가에게 
일방적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힘을 휘두르는 식민지주의와도 상통한다.   지의 
제국주의는 부분적으로 해당 지역의 사상이나 문화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마치 ‘식민지 근대화론’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그냥 
제국주의가 아닌 지의 제국주의라고 ‘지’라는 한정어를 앞에 쓴 이유는 
‘지식’을 매개로 제국주의가 행해지므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그렇다면 거기에 매개된 지식이란 과연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흔히 동아시아 
지역의 사상을 말할 경우 유교,불교,도교라는 3교의 틀을 사용한다. 이 세 사상은 
긴 세월 동안 게다가 여러 분야에서 이 지역의 문화에 깊숙이 관계하였다. 이 세 
사상이 어우러져서 이룩된 이 지역의 문화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독특한 것이다. 그래서 동아시아 지역을 말할 때면 이 세 사상을 빼놓을 
수 없고, 그 중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 번영을 특히 유교의 정신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러면 이 유도불 3교로 대표되는 지식을 매개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누가 
누구에게 지의 제국주의를 실시했다는 말인가? 그 대답은 중국이 주변 국가와 
민족에게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지적 유산은 중국 주변의 국가나 민족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세련된 그리고 선진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렇게 취급되는 
데에는 중국 자체에서 개발된 사상인 ‘이하론(夷夏論)’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이하론’이란 다시 말하면 중화와 오랑캐라는 차별적 시각으로 문화를 설명하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이다. 서양세력이 동아시아 지역에 들어오기 이전까지 중국은 
중화주의적 세계관으로 이 지역의 문화 읽기를 해 왔다. 서양과의 만남 속에서 이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정면으로 도전 받기 시작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중국대륙에서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중국인이 자기네 이외의 문화나 사상을 보는 시각인 ‘이하론’은 그 뿌리가 
깊다. 중국 지역에 처음으로 인도의 불교가 전래되면서 봉착했던 문제도 
이것이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삼국 중의 하나인 오나라 때에 채록된 
『모자리혹론(牟子理惑論)』에 이렇게 전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랑캐에 군자가 있더라로 군자가 없는 중국만 
못하다”하셨다. 맹자는 진상(陳相)이 허행(許行)의 술법을 배우는 것을 꺼려하여 
말하기를, “나는 중하(中夏)를 가지고 오랑캐를 교화시킨다는 것을 들었어도, 
오랑캐를 가지고 중하를 교화시킨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대는 어려서부터 요,순,주공,공자의 도를 배웠는데, 이제 그것을 버리고 
다시 오랑캐의 술수(여기서는 불교를 지칭)를 배운다면 이는 잘못된 게 아닌가”
  중국에 공자와 맹자의 도가 있는데 이것을 두고 오랑캐가 들여온 불교를 
배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식의 ‘이하론’은 위진 남북조시대에도 
당나라에도 계속하여 청나라 말기와 민국 초기에도 계속된다. 양이(洋夷)라는 
신조어도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중화주의적 세계관에 강하게 그리고 오래 세례를 받은 나라일수록 중국의 문화를 
타자(他者)의 문화로 상대화시키지 못하고, 선진되고 세련된 그래서 따라야 할 그 
무엇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나라들에게 있어서 중국은 상호 교류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대상이었다. 그 배움도 어디까지나 그것을 수용하고 따르기 
위한 일방적인 배움이었다.
동아시아 지역이 여타의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으로 유도불 3교 사상을 꼽고 
있지만, 이 지역에 속한 민족이나 국가가 상호간에 서로를 인정하는 문화적 특성은 
결코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국이나 일본에서 진행되는 유도불 3교에 대해 
중국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기 위한 
노력을 공유하지 못했다. 유도불 3교가 이 지역 문화를 특징 짓는 공통점으로 
거론되지만, 중국 자체에서는 인식되지 않은 공통점이었다. 일본의 유교나 불교 
그리고 한국의 유교나 불교에 대해 중국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랑으로 비유를 
들자면, 유불도 3교를 매개로 한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지, 서로를 확인하는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다.
그러면 위의 논의로 다시 올라가서, 유교를 매개로 동아시아론을 주장하는 것이 
지의 제국주의인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중국인들이 문화를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각으로 ‘이하론’이 있었음은 여러 문헌 사례들이 증명한다. 그러면 
‘이하론’적인 입장에서 문화를 평가하는 사유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으로 
우리는 『춘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중국의 고대시대부터 유교의 핵심 
경전 중의 하나로 자리잡는다. 이 책은 주(周)나라 황실을 중심으로 당시 여러 
제후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이른바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삼는 유가의 명분론(名分論)이 잘 표출되었다. 그것은 천자와 제후 그리고 임금과 
신하라는 엄격한 차별적 신분질서에 의한 봉건제를 기본 정신으로 한다.
이런 기본 정신 때문에 중앙집권적 봉건통치를 강조하는 위정자는 『춘추』에서 
그리는 이상사회를 정치 모델로 삼는다. 『춘추』를 이상으로 삼는 유교의 
사상가들은 일찍이 이 책의 정확한 뜻을 밝히기 위해 많은 주석서를 내었다. 그 
중에서 「곡량전」, 「공양전」, 「좌씨전」은 역대 왕조의 과거시험 과목이었고,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이나 성균관의 커리큘럼에 언제나 들어갔다. 어떻게 보면 
봉건통치를 위한 철저한 이데올로기 교육이다. 일본의 명치임금이 유신 초기에 
청나라의 통치제도를 모델로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교육칙어’를 
통해 임금과 신하의 상하 질서를 잡으려 했던 것도 이것이다. 박 대통령 당시에 
‘국민교육헌장’을 반대했던 배경도 그가 과거의 봉건통치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유가의 정치사상은 역사적으로 상하 차별적 계급질서를 기본 
골격으로 했다.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통치제도를 이상으로 한다. 
동아시아 네 나라의 경제성장을 유교사상과 결부시킨 것도 사장을 정점으로 
사원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하는 정신으로 경제를 일으킨 것에 견주었다.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유교 사상 속에는 ‘이하론’이 들어 있다. 중국은 문화민족이고 
나머지는 다 오랑캐이다. 이런 유교 사상을 매개로 하는 이른바 ‘유교의 세계화’ 
내지는 ‘유교 자본주의’ 논의가 중화주의적 세계관과 별도로 논의될 수 있을까? 
  
 
 
  
 
   유교의 핵심에는 중화주의적 중심-주변의 세계관이 들어 있고, 그 세계관에 
서서 중심에서 주변 쪽으로 그리고 중국에서 여타 동아시아 지역 쪽으로라는 
일방적인 문화 읽기 방식을 비판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1970년대 전후로 일기 
시작했던 동아시아론은 지의 제국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된 책임은 
중국 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을 대상화 하고 방법으로 보고 나아가 
타자(他者)로 인식하지 못한 쪽의 책임도 크다.
  우리의 과거는 『논어』나 『맹자』를 읽으면서 공자나 맹자라는 한 외국인의 
생각이 어떠했는가, 나아가 그가 살았던 타(他)문화가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도(道)를 찾으려 했다. 이런 현상은 한자(漢字)를 
쓰는 일본이나 우리 나라에 공통이다. 더구나 유교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조선의 경우는 그 정도가 일본보다 심한 편이다. 도(道)라는 블랙 홀 속으로 
시간은 물론 지역적 차이도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우리의 과거 지식인들은 동(同) 
시대의 중국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비교적 적게 하였고 말할 수 있다. 도(道)를 
탐구하려는 열정에 비교해서 말이다. 고려말의 불교학자 지눌은 당나라의 불교학자 
종밀을 생각했고, 조선의 유교학자 이퇴계는 남송의 주희를 사사했다. 모두 전 
시대의 중국 인식이다.
  최근에 논의되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쓰자는 것도 우리의 중국인식과 무관할 
수는 없다. 누가 뭐래도 한자는 외국의 문자이다. 마치 로마자나 또는 
산스크리크어의 데바나가리처럼. 그것은 우리의 글자는 아니다. 물론 우리문화 
속에 긴 시간을 통해 깊숙하게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한자를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외국의 글자이고 문화라는 인식을 
못한다면 한자 병용은 지의 제국주의 연장선만 더 길게 할 우려도 없지 않다.
  
 
 
  
 
 
 
 4. 중국불교 연구 반성

  이야기를 좁혀서 불교 연구 쪽으로 들어가 보자. 동아시아의 불교는 전래 
당시부터 이 지역의 전통사상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연구되어 왔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들이 불교를 어떤 시각에서 연구했는가를 기준으로 그 변천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보려 한다.
  제1기는 불교를 ‘성인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여 그 가르침의 내부에 
관심을 두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양상은 동아시아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로 
20세기의 근대적인 의미의 불교 연구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계속된 시각으로 아주 
고전적이고도 긴 역사를 갖는다. 이 시기에는 석존(釋尊)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를 
탐구하여 ‘깨달음’의 획득을 가장 절실한 당면 과제로 삼았다. ‘가르침’으로서 
접수된 불교는 연구자들에게 불교의 역사성이라든가 지역성 따위는 모두 사라지고 
모든 문제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녹아들고 만다. 그리하여 불교가 우리와는 
다른 이국 땅에서 생긴 외국 문화라는 생각보다는 ‘가르침’의 보편성 곧 
‘도(道)’로서 신앙되어진다.
  제2기는 이상과 같은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불교가 가지고 있던 주관주의적인 
요소를 극복하려는 노력 속에서, 20세기를 전후로 근대적인 의미를 ‘불교학’또는 
‘불학’이 생긴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부처의 가르침’을 대상화하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려는 의식도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의식은 아시아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서구의 충격과 더불어 생긴 것으로서, 모양만 학(學)이라는 
하는 정도였다. 논리학, 기하학, 형이상학 등의 학과는 애초부터 그 성격이 
다르다. 이때의 ‘불교학’이 제1기와 서로 다른 점은 서구의 철학용어 내지는 
방법을 빌어 그 이전의 ‘불교’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불교학’은 
‘천태학’, ‘선학’, ‘화엄학’, ‘정토학’, ‘진언학’등으로 분화되기도 
한다.
  제3기는 이른바 지나학(Sinologie)이라는 입장에서 동아시아의 불교를 연구하는 
시기이다. 지나학은 유럽에서 생긴 일종의 문화학의 한 분야로, 유럽에서 유학한 
일본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일반문화학으로서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의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써 불교를 연구하는 태도이다. 두 번째 태도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불교연구이다. 이런 태도는 공산혁명 직후부터 이제까지 
중국대륙에서 진행되었던 불교연구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면 이하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동아시아가 서양의 근대를 경험한 후 
불교연구를 어떻게 해 왔는가를 보도록 한다.

 
 
1) 중국의 경우

  근대적 의미의 불교학 연구자로 먼저 양문회(1837~1911)와 그의 영향을 받았던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장병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인식론, 우주론, 
인생론 등 서구철학 개념을 들어 그에 대응하는 사상이 불교에도 있다는 식으로 
나왔다.
  이와 함께 1898년 장지동이 당시의 조정에 제출한 ‘묘산흥학’에 대항해서 
나타난 경안(1815~1912)과 그의 제자 태허(1890~1949) 등의 움직임을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의 움직임은 호교의식과 당시의 ‘동서문화논쟁’등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시기의 불교 연구는 당시 중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혹은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불교를 연구했다.   이런 연구 시각은 
『해조음』(1920~1929)이라는 잡지에 발표되었던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과학과 인생관의 논쟁’ 혹은 ‘과학과 현학의 논쟁’이라는 당시 사조의 
흐름 속에서 불교의 교리를 해석한 것이 눈에 띄는 특징이다. 즉 유식사상과 
서양의 인식론 내지는 논리학과 비교하는 것이라든가, 태허가 쓴 진화론에 관한 
논문이라든가, 불교와 교육이라든가 등이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과거의 불교를 역사를 되돌아 보는 중국불교사에 관한 저술은 
나타나지 않는다. 불교사에 관한 연구가 나타나는 것은 1930년대 경부터인데 
다음과 같은 책을 들 수 있다. 장유교의 『중국불교사』, 호적의 『중국선종사』와 
그의 제자 탕용동의 『한위양진수당남북조불교사』, 황참화의 『중국불교사』 등이 
출판된다. 이 중에서도 탕씨의 연구는 후세 연구자에게 미친 영향이 자못 큰데, 이 
책의 특징은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불교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어서 공산혁명 이후의 불교 연구에 나타난 시각을 보자. 이 시기에 나타난 
시각들은 크게 세 부류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불교는 당시에 중국의 고유 사상 예컨대 위진현학 등에 의탁하여 연구했는데, 
뒤에는 중국화된 여러 종파가 많은 명제와 사상을 제기하여 중국고대철학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불교는 다시 송명리학에 흡수되어 중국 고유 
사상과 합류가 되어 고대 전통 철학의 일부가 되었고 보는 부류로, 조박초, 두계문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부류는 중국철학사를 유물주의와 유심주의와의 대전으로 
보고, 불교철학은 유심주의의 중요한 무기였다는 의견이다. 이런 입장은 그 뒤 
임계유 등에 계승되어 현재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세째 부류는 불교는 
유물변증주의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대립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그것은 
우리들의 인식을 풍부하게 해주었다는 등, 어느 정도는 합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는 부류이다. 여기에는 고진농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 진행된 이상의 논의는 임계유의 여러 저서에 그대로 반영된다. 임씨는 
중국불교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첫째, 불교는 유심주의 종교 철학체계이고 철학성이 풍부하다. 둘째, 중국불교는 
외국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중국철학사의 중요한 부분이고 송명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세째,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분명히 하는 것에 의하여, 
유물주의의 이해가 개발된다. 네째, 불교의 연구와 이해는 유심주의 비판의 힘이 
된다. 다섯째, 불교 연구에 선행하여 역사 유물주의의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임씨의 이런 불교 인식은 대륙에서 출판되는 중국불교 연구의 일반적인 관점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음은 일본에서의 불교연구 경향을 보도록 한다.
  
 
 
  
 
2) 일본의 경우

  일본에서는 1910년 『불교사림』의 발간을 근대적 의미에서의 
동아시아불교연구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당시의 연구 상황은 ‘선(禪)을 
중국 사상의 귀착점’이라는 말에서 보여주듯이, 불교는 인도에서 씨 뿌리고 
중국에서 꽃 피고 일본에서 결실을 보았다는 일본지상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런 의식은 특히 선(禪) 연구자들에 잘 드러난다.   일본지상주의 세계관은 
송나라 시대에 선이 유행했다는 대략적인 사실에 편승하여 선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소재로서 성리학을 들추고, 성리학 내부에서 새롭게 추구되었던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할 열쇠를 이미 앞질러 선이 내어놓았다고 착각하게 하는 
종파의식과도 결부되었다.
  이런 시각에서 진행된 당시의 동아시아불교연구는 ‘동아시아 문화의 한 
날개로서의 불교’라고 하는 이해를 빼먹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내게 한다. 
이들은 일본 불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지역이나 시대에 속하는 불교 인식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최근 들어 이런 시각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동아시아 
사상사라고 하는 시야 속에서 이 지역의 불교사상을 연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좀 특이한 것은 이런 반성적 시각은 불교학을 전통적으로 하는 이들에게서보다는 
동아시아 사상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3) 한국의 경우

  근대적 의미에서의 한국불교사 연구는 일제시대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에는 
비판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일본의 불교 연구시각과 관계를 맺고 진행되었다. 
일본인에 의한 불교 연구의 시각 중 대표적인 것으로 종파별 연구를 들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불교의 전래 당시부터 승려와 사원의 관리 차원에서 종파가 
형성되었다. 이 점은 한국이나 중국의 불교가 중앙전제왕권의 비호 아래 수용 
발전한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해방 후에 남북한이 갈렸다. 남한의 경우는 일제시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또 
일제시대에 훈련을 받은 연구자들에 의해 지속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남한의 경우는 일본에서 불교를 연구하는 시각과 비교적 밀접하게 상호 교류하면서 
진행되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들에 의한 불교연구 경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승려 도성출입 금지’로 상징되는 조선시대의 불교탄압은 일본 조동종 
승려들이 조선총독부에 개입함으로 해서 변모되기 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불교를 어떤 시각에 연구해 왔는가는 곧 
남한에서의 불교 연구 시각을 알아보는 데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당시 남한의 불교연구의 특징을 보통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시대적 편향 
경향이다. 즉 신라시대에 연구가 집중되었다. 둘째로 인물 편향을 들고 있다. 즉 
원효, 의상, 의천, 지눌, 서산 등 포퓰라한(popular) 스님들에 대한 연구가 
집중되었다. 셋째로 연구방법의 재정립에 관한 점이다. 인물이나 ‘불교적 
사건’에 접근하려면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배경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특정 인물의 삶을 진공상태로 규정하고 서술하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그러면 해방 후 북한의 경우는 어떠한가? 북한에서는 불교를 봉건 통치 수단으로 
보고, 부처의 힘을 신비주의로 본다. 불교에 대한 북한 학자들이 이런 시각은 
북한만의 독자적인 견해는 아니다. 중국 대륙에서의 공산혁명 이후의 불교인식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이것은 북한이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중국 대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것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북한에서의 불교 
연구시각을 북한에만 한정시켜서 검토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중국대륙에서 불교를 
어떻게 연구했는가와 연관시켜 북한의 불교연구 시각을 검토하는 것이 합당하다.
  북한에서는 동북아시아에서 퍼져 있는 불교는 당시 지식계급분자들의 
봉건통치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불교야말로 
유심주의철학의 대표로 비판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불교가 비록 문화 영역에 
많은 성과를 이루어, 보호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불후의 작품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불교는 예술을 마약 판매의 광고로써 이용하였고, 그 예술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끼친 해독은 컸다고 이해하였다. 나아가 역사상 종교를 믿는 무리들이 
과학 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에 따른 종교의 반동적 본질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
  
 
 
  
 
5. 문제점

  이상에서 동아시아의 불교를 바라보는 한,중,일 삼국의 시각을 살펴보았는데, 
앞으로의 연구 좌표 설정을 위한 과정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기존의 문제점을 
요약해본다.

  1. 동아시아 사상사를 시야에 넣지 않고 불교만을 고립적으로 다루는 시각.
  2. 자파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호교의식이 매개된 불교연구 시각.
  3. 종파의 틀에 기초를 두고 불교를 분류하고 연구하는 시각.
  4. 지의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에 서서 논의되는 동아시아론이나 역사유물주의 등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리하게 불교를 해석하려는 시각.
  5. 문헌지상주의 관점에 입각한 연구 시각.
  6. 불교는 인도에서 씨 뿌리고, 중국에서 꽃 피고, 일본에서 결실을 매었다고 
하는 자국       중심주의적 시각.
  7. 불교의 특수한 신앙이나 교리체계를 고려하지 않은 일반역사의 범주 안에서 
연구하는 시각.

  이상의 시각은 마땅히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4의 시각은 불교 
연구에만 국한하는 영향이 아니라는 점에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권 밖에서 생성되어 유행하는 사상을 기준으로 불교를 거기에 짜 
맞추는 시각의 밑바닥에는 서양은 선진되었고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것은 서양의 어떤 사상에 입각하여 불교를 분석하고, 불교에도 그런 요소가 
있음을 논증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양자역학의 이론으로 불교를 
설명하여 불교의 과학성을 논변하는 것 등이다. 불교와 민주주의를 비교하는 
연구도 이런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시각은 중국과 북한의 
경우는 역사유물주의 입장에서 불교를 분석하는 쪽으로 드러난다.
  끝으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불교 자체를 방법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제안하고자 
한다. 즉 불교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불교를 방법으로 삼아 동아시아 사람들이 
외래 사상인 불교를 어떻게 이해했고 자기화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를 바라보는 이 지역 사람들의 사유를 추출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교라는 보편성은 그것대로 유지되면서, 불교를 매개로 전개된 그 지역 
사람들을 특수한 이해방식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특수성이 모여서, 서로의 
특수성을 각각 확인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진정한 동아시아론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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