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8년 5월 11일 월요일 오전 06시 43분 03초 제 목(Title): Re: 야단법석 야단법석의 주인공이신 원효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서 퍼왔습니다. 불교의 대중화와 화쟁사상등 원효스님에 대해 좀 더 알수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번호 : 55/92 입력일 : 96/04/01 10:04:05 자료량 :118줄 제목 : 역사 속의 왕사들-원효대사와 무열왕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서기 654년에 김춘추가 제29대 왕위에 올랐다. 이분이 태종무열왕이다.무열왕이 왕위에 오른지 2년되는 655년에 백 제와 말갈이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략, 33성을 빼앗는 대 공세를 취했다.그러나 이 침공은 백제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라는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요청하게 되고 당나라는 이를 받아 들여 나당연합군을 형성했기 때문이다.무열왕 7년(660)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결국 멸망하게 되고,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 6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다시 당나라 군사를 이 땅에서 몰아내 멸실공히 민족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말하자면 무열왕은 삼국통일을 바로 눈 앞까지 바싹 당겨놓은 왕이었다 . 재위시 밖으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나 안으로는 불교가 융성해 신라 백성들은 평안한 삶을 구가하고 있었다.신라의 서울 서라벌에는 날마다 기와집들이 처마를 잇대어 늘어나고 있었다.이렇게 날로 발전해가는 장안 거리에 언제부턴가 허름한 옷차림의 한 사람이 소리를 외치며 다녔다.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 받칠 기둥을 꺾으리라. 관세음보살"이미 서라벌 장안에서는 이가 원효대사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원효대사의 이런 행각은 어느덧 궁궐에까지 화제가 되기에 이르렀다. 무열왕에게 한 신하가 아뢰었다." 지금 장안에는 원효대사라는 이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 받칠 기 둥을 꺾으리라" 하면서 다닌다고 합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르 며, 어떤 사람들은 그가 실성했다 고도 하는데 그의 행동이 신라 불교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무열왕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음- 이는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두겠다는 뜻이다. 그는 큰 성현임 에 틀림없다."그리고 명을 내렸다."원효대사라는 분을 모셔오도록 하라."신하 는 깜짝 놀랐다."그런 사람을 궁궐에 불러서 무엇하시렵니까.""이 나라에 큰 성현이 계신다면 그보다 이로운 것은 없다. 어서 모셔오도록 하라 ."원효 대사와 태종무열왕과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원효대사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39년(617)에 경산군 자인면, 당시 압량군 佛地村에서 태어났다.10여세 때 출가하여 불법을 배웠고 나아가서는 < 논어>와 <노자> 등 의 유학서와 도가의 글도 익혔다. 남달리 영리하여 특정한 스승이 없이도 혼 자 학문의 깊은 뜻을 연구하면서 공부했다고 한다.당시 신라인들은 승속할 것 없이 중국으로 유학하는 것이 최대의 희망이었다. 원효대사 역시 불교가 크게 떨치던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하고 의상대사와 함께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에 날은 저물고 비가 내렸다. 그들은 인가를 찾아 헤매다가 어둠이 닥쳐 할 수 없이 작은 굴 하나를 발견하고는 거기서 묵기로 했다. 원효대사는 한 밤에 갈증이 심해 일어나 물을 찾았다. 마침 어 떤 그릇에 빗물이 고여 있는 것을 찾아내어 벌컥벌컥 마셨다. 참으로 시원한 물맛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중에 마셨던 물그릇은 다름아닌 해골 바가지가 아닌가. 원효대사는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솟아났다.바로 그 순간에 원효대사는 무릎을 치며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心法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렇다. 마음이 일어나니 온갖 현상이 일어나는구나. 마음이 없을 때에는 해골의 물이나 우물의 물이나 무엇이 달랐던가. 부처님도 "이 세상 모든것 은 오직 마음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로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따로 구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원효대사는 그길로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혼자 되돌아 왔다. 그뒤 분황사에 머물고 있을 때, 객승이 알아보고 묻는 이도 있었다."스님께서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지 않았습니까.""그렇소.""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계십니까." "이 세상에는 제각기 이름을 가진 수없는 강이 있소. 그러나 그 강물 은 흘러서 모두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오.바다에 들어간 강물은 자기 이름과 빛깔이 없어지고 모두가 한 빛깔 한 맛이 될 뿐이오. 불교에는 수많은 宗派 가 있지만 모두 한 맛의 진리바다로 들어갈 뿐이오. 그러므로 중국의 불교 이든 신라의 불교이든 萬法이 一佛乘으로 귀착 하는 것이 마치 강물이 바다 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데 구태여 중국까지 갈 것 이 뭐가 있겠소." 원효대사는 모든 종파를 포괄하는 동시에 이를 초월해야 하며, 또한 관용 적이고 공평무사해야만 부처님의 정신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일생을 통해 면면이 흐르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和諍 사상을 이룩하게 된다.이 화쟁새상과 더불어 또하나의 산맥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眞俗一如사상이다. 원효대사는 설법을 할 때마다 이런 말을 빼놓지 않았다."현실에 물든 더러운 마음(俗)을 닦아 깨달음의 세계로 향해 끊임없이 추구하고 수행 함으로써 완성된 인격(眞)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 리고 그 깨달음의 세계 (眞)에 이른 사람은 아직 무명에 허덕이는 중생을 교 화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 眞俗一如사상이야말로 위로는 인격의 완성을 위해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무명중생을 교화한다는 上求菩提 下化衆生의 대 승적 보살정신 이다.이러한 화쟁사상과 대승적 보살정신이 원효대사로 하여금 거리로 나서게 한 직접의 동기가 된 것이다.원효대사는 당시 귀족적이고 고 답적인 불교를 타파하고, 일체의 형식적인 구애를 벗어나 지방의 촌락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가무와 잡담 속에서 불법을 널리 펴 서민들의 교화에 온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남녀 노소할 것없이 염불 한 구절식은 다 따라할줄 알았다는 것은 그만큼 불교가 민중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런 가운데서도 원효대사는 1백여종 2백40여권의 저서를 남긴 이나라 최대의 불교학자이자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세계의 역사 위에 우뚝 서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원효대사의 참다운 위대성은 무애자재한 생활속에서 上求菩提 下化衆生의 보살정신을 몸소 실천하여 이 땅에 부처님의 산 가르침을 실현하고자 한 데에 있을 것이다.앞서 무열왕의 부름을 받고 궁궐 에 들어간 원효대사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결국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이라는 아들을 두게 된다. 이 사건이 단순한 애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까.여기서 한번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원효대사가 失戒한 뒤로 스스로 小性居士라 자처하며 더욱 서민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들의 교화에 전심전력을 기울였 다. 이는 바로 소승적 持戒에 집착하는 것이 불교의 참정신이 아니라 일체를 포용 하고 일체를 초월한 대승의 경지를 실행함으로써 불교를 생활 속으로 끌어 내리려는 한 방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때 원효대사와 무열왕과의 만남은 대승불교의 정착을 한발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만년에는 穴寺에 들어가 참선과 저술에 여생을 보내다가 686년 3월 30일 70세로 입적에 들었다.김원각<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