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4년12월27일(화) 13시31분48초 KST 제 목(Title): 그 때, 한암 스님은.. 그 때, 한암 스님은 원을 발로 지워버렸습니다. 원이란 원래 없던 것이라는 위의 개구리 아빠님의 말씀이 중요한 말이군요. 불법에서 말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는 불이법(不二法)이고 이를 중도라고 말합니다. 즉 중도는 두개의 중간이 아니라 본래 둘이 아님을 말합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색과 공이 둘이 아니고, 어떤 이분법적인 것도 다 둘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 가면 처음 만나는 문이 있는데 그 문을 불이문 또는 일주문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이 우주는 구분이 없다고 합니다. 너와 나도 구분이 되어 있지 않고, 조물주와 피조물도 구분이 되어 있지 않고 모두가 동일한 한생명인 부처생명이라는 것이 불법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인도의 사상들(요가.바라문)과는 근본이 틀립니다. 요가나 바라문 사상은 내가 노력해서 신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불법은 본래 하나인데 스스로 하나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으니(중생) 우기지만 않으면 부처생명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즉 완전한 생명의 해방을 선언한 종교입니다. 신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등 모든 분리된 사고에서 싹 트는 공포에서 해방시킨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위의 예에서 원이란 것은 스스로 만든 굴레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허상에 사로잡혀서 공포심에 떠는 실상을 간단하게 묘사한 것이고, 이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증득하신 한암스님은 간단히 원을 지워서 중생의 한계성이 무너진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꺽규님의 답도 재미 있습니다. 밖에 있는 자가 이미 죽었는데 누구를 죽이겠냐는 말씀은 재미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에 대하여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죽음에는 육체적인 죽음이 있고, 한계성의 탈피로서 이전 상태에 대한 정신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불교에서는 죽음으로 인정도 하지 않습니다. 육체는 불교에서는 입고 있는 옷 정도로 생각하기에 옷을 벗어 놓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정신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그것을 중생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여태까지 독립된 중생이라고 우기고 살던 인생관의 죽음을 말합니다. 중생에게는 육체적 죽음이 죽음이지만, 중생이 아님을 인정할 때는 육체적 죽음은 죽음이 되지 못합니다. 중생이 죽으면 원래 있던 부처생명이 꽃 피우는 것을 확인한다고 합니다. 따로 부처생명이 있어서 그 생명이 중생대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다 부처였구나 라는 것을 확인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자분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불교적으로 보면 예수님도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 같이 굴절된 죄의식과 공포심에 시다리는 생명들을 해방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기독교 분들이 말하겠지만, 성경을 불법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죄의식에서의 해방을 선언하신 분입니다. 원죄설의 굴레에서 해방시키신 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있는 죄를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불법의 입장에서 십자가가 그런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죄의 부정, 지금까지의 모든 죄는 예수님이 짊어지셨으니 이제 죄의식에서 사로잡혀 억압된 인생 살지말라는 것이죠. 죄의식에서 해방이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부활입니다. 그것을 불교에서 말할 때는, 성도라고 말합니다. "크게 죽어야 크게 산다"는 불교의 말은 곧 부활, 또는 성도(깨달음) 을 말합니다. 기독교 분들이 보면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면 불법의 입장에서 보는 성경이구나 정도로 치부하세요. 그렇게 불법에서 말하는 죽음은 정신의 죽음이지 육체의 죽음이 아닙니다. 단절되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한정했던 인생관의 전환이야 말로 참으로 죽음입니다. 그다음 위의 일화와 같은 고승들의 문답은 어찌보면 황당하고 장난스러운 면들이 많이 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아무렇게나 주고 받지는 않습니다. 그 한 행동 행동에는 몸으로 증득한 깨달음의 세계가 다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의해서 나오는 행동이라서 아무렇게나 누구나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도 있지만 깨닫지 못하면 어딘가 미흡한 곳에 걸리게 됩니다. 이심전심이란 것은 텔레파시가 아니라 두 사람이 논리의 세계(논리는 모두 이분법이 기초이죠)를 떠난 절대의 경지를 주고 받는 것을 말하고 그 행동과 말은 부처님이 설법하신 근본 교리에 전혀 어긋남이 없다는 것 입니다. 그럼.... 모든 kids의 분들 행복이 가득한 세계속에서 진리와 함께 하는 연말 되세요.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