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7년10월09일(목) 11시39분56초 ROK 제 목(Title): Re: 일방통행. 크로체님의 말을 다 부정하지를 않습니다. 크로체님의 말중에는 훌륭한 말들이 많습니다. 그 말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라고 일일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위에서 답하신 그 여섯가지 말중에서 처음의 말을 제외하고 둘째 말, 셋째 말에 대하여는 크로체님이 이야기를 한데로 그와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넷째 말, 다섯째 말, 여섯째 말은 크로체님이 진아, 지켜보는자, 나'의식이 무엇인지 아무리 설명을 하고 부연해도 어떤 불교의 선지식도 용납하지 못하는 말들입니다. 불경의 양이 그렇게 방대한 이유는 불교란 종교가 독선적이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외형적 타협에는 열려있지만 내용의 타협에는 매우 독선적이기 때문에 경전의 양이 방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위에 중생이 있다고 말해도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독선입니다. 더구나 불교는 명상을 통하여 깨닫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하여 자신의 인생을 걸어가게 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반야,이치)에는 매우 민감하고 독선적인 것이 불교입니다. 반야부 경전은 매우 방대한데 그 방대함은 지혜에 대한 불교적 독선의 역사입니다. 부처님이 번뇌를 제압하게 된 것이 마음으로 제압한 것이 아니라 지혜로서 번뇌를 소멸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일체 모든 명상이나 고행이 번뇌를 소멸시키지 못함과 오직 지혜만이 번뇌를 해결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 종교입니다. 부처님의 반야지혜만이 생사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뛰어난 성인이라고 할 지라도 그의 말이 지혜에서 어긋나는 씨앗이 될 소지가 있으면 방대한 논서를 지어서 까지도 끝까지 그 말의 거짓된 소지를 찾는 것이 불교입니다. 대승기신론, 중론이 그와같은 반야를 깨끗이 보전하기 위한 논서들입니다. 불교는 어떤 사람의 마음의 체험같은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직 지혜를 흐리고 있는가 아닌가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법이란 지혜를 말하는 것이고 법맥이란 지혜의 맥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명사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불교는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다 인정하고 다 내버려둡니다. 외형적인 것은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숨은 밀행을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하는데로 찬탄하고 그 사람이 밀행이 아닌 행을 하면 그렇게 하는데로 찬탄을 합니다. 그러나 내용을 들고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렇지가 못한 것입니다. 법이란 내용이고 내용이란 곧 반야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언제나 풀어질 수 있는 꼬투리를 던지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결론을 내어버리고서 그 결론이 옳음을 설명하지를 않습니다. 불교는 설명을 뒤에 달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뒤의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의문이 저절로 나오게 합니다. 의문을 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크로체님이 하는 물음에 답을 하지 않는 것은 그 물음은 진행되고 있는 문제를 크로체님이 알지 못한 채로 마치 크로체님의 어떤 체험의 거짓됨을 따질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반야지혜와 위신력만이 중생의 등불이 된다고 하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개인의 마음의 체험은 무시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체험을 하였건 하지 못하였건 관심의 대상도 아닙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번뇌망상을 소멸하는데 무너지는 것으로 했느냐 무너지지 않는 지혜로서 소멸을 시켰느냐를 중요시 여깁니다. 무너지는 자신의 마음으로 한 체험인가 무너지지 않는 불심으로 한 체험인가만을 중요시 여깁니다. 무너지는 마음으로 이룩한 것은 마음이 무너질 때에 지금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지 결과는 마음의 무너짐과 함께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할현상의 배후에 진아가 있다. 진아위에 역할현상이 있다. 이 두가지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무너지지 않는 지혜의 생명원리에 어떤 영향을 주기에 문제의 정도가 틀린지를 명확하게 알 때에 불가에서는 "대용"이라고 합니다. 대용이란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뒷 설명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을 읽어보십시요. 중생의 마음이 그대로 본각(본래 깨달음)이다. 결론적 단정을 내려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 이렇게 전개를 합니다. 시작도 벌리지 않고 중간에 전개를 하다가 끝에서 다시 벌림이 없이 마무리하는 것이 불교에서 이야기를 하는 방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