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7년09월11일(목) 18시04분35초 ROK 제 목(Title): Re.Re 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기에 어려울 뿐입니다. 해 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기에 어려울 뿐입니다. "내가 없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잃어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에 시도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해 보지 않고 결과부터 걱정되기에 시도를 하지 않을 뿐이지 "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은 세수 하다가 코 만지는 것 만큼 쉽습니다. "내가 없음"으로 일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것이 "창조주" 입니다. 내가 없음이 사실이라면 창조주가 나를 만들었다는 거짓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구원이 될 수 있다는 약속과 이미 구원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하는 두 가르침은 공통점이라고는 인간의 삶의 양태적인 모습이 비슷하다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내용은 너무나도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간에 이해를 시도하는 것은 종교간의 마찰이 괴로움만을 남간다는 평범한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이해를 시도하려고 할 뿐입니다. 참으로 진리성에서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카톨릭에서 불교와 대화를 할 때에 과연 하나님을 양보할 수가 있겠습니까? 가급적이면 불교는 철학이나 정신수양적인 면으로 묶어두고 그 위에 하나님이 사랑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럼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인간의 삶속에서의 서로간의 영역의 양보 수준에서의 대화만이 가능하겠지요. 카톨릭엣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죽이고 성인을 만나면 성인을 죽여야 한다는 불교의 근본을 수용할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근본에서의 차이에 대하여 눈 감으면서 외피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종교간의 대화일까요? 구원으로 향하는 카톨릭과 이미 구원이 완료되었음을 믿으라는 불교의 믿음과 믿음의 내용이 서로 다른데 내용을 젖혀두고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서로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근본을 가지고 이야기 할 것은 눈 감은채로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려는 대화 정도를 종교간의 이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은 종교간의 이해가 아니라 종교 집단간의 집단의 보호 논리가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