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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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7년08월28일(목) 10시58분39초 ROK
제 목(Title): [Re][Re] 역할 현상



인과는 분명하나 인과의 정체에는 개아가 있지 않습니다.
각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 개아가 없다는 것과 서로 모순이 되거나
혹은 개아가 없다는 것이 인과법이 있다는 것과 모순이 되지를
않습니다.

다르게 보인다고 하거나 같다고 하거나
둘다 미혹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미혹이 끊어져서 모두가 같게 보인다면,
이것이야 말로 크나 큰 미혹입니다.

그러므로 의문을 제기하신 분은 큰 미혹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니
매우 좋은 상황이고 당연한 의문을 하신 것이고
찬탄받을 의문을 제기하신 것입니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있습니다.
이 음식으로 주린 배를 달래고
몸과 마음을 바로하여 사회의 대중을 위하여 봉사하겠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가에서 공양할 때에 부르는 게송입니다.

물은 물이고 곡식은 곡식입니다. 물과 곡식이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둘이 서로 같은 것이 아니지만
성질이 똑같습니다. 근본 성질은 물이 물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의 은혜로 있는 것이고
곡식이 곡식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노고로 있는 것입니다.
만인은 또한 물과 곡식으로 인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하게 되는 성품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물이 물로서 존재하고 곡식이 곡식으로 존재하고
만인이 만인으로 존재하여 서로 다른 모습이나
존재의 성품에는 물이 물이라는 독자성품으로 존재할 수 없고
곡식이 곡식이라는 고유 성품이 있어서 곡식으로 존재할 수 없고
만인이 만인이라는 고유 성품이 있어서 만인으로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의문을 제기하신 법우님이나 제가 서로 다른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노력을 해서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해도 같아지지 못합니다.
오히려 같아지면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같아져 버리면
법우님과 저 둘중에 한사람은 세상에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법우님과 저하고 두 사람이 외형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사는 모습이 다르지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되는 존재의 성품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제가 오늘 점심에 설렁탕을 먹고
법우님께서 오늘 점심에 비빔밥을 먹으면
제 육신의 생리작용과 법우님 육신의 생리작용이 모르긴 몰라도
달라지고 그리고 그 결과도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육신은 설렁탕으로 인하여 달라진 육신이 있고
법우님 육신은 비빔밥으로 인하여 달라졌다는 원리는
동일합니다.

그 다음에 설렁탕과 비빔밥이 존재하게 되는 원리에도
설렁탕 고유와 비빔밥 고유의 성품이 원래부터 있어서
설렁탕과 비빔밥이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법우님이 이렇게 통신이라는 공간에서 만남을 가지면서
두 사람의 마음은 역시 다른 것을 느끼고 있으니
둘이 다르지만 둘이 다른 원리는 같습니다.

서로 다른 것은 틀림이 없는 현상적인 모습이지만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치속에서는 서로 다를 수가 없습니다.

대충 이정도면
서로 달라보이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복되고 참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본적인 존재원리를 무시하고
현상적으로 다른 것에만 치우칩니다.

그래서 나와 너는 완전하게 관계가 없는 서로 고유한
나와 너야…

나라는 개체의 모습과 너라는 개체의 모습의 밑바탕에 있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복되게 만드는 그 원리속에서
나와 너라는 벅찬 다름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별도의 고유영역으로서의 "나"를 주장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미혹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을 억지로 같아져야 한다는 것도 미혹입니다.
현상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존재의 성품은 모두 동일합니다.

그런데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의 모습은 한 순간도
고유한 것이 없고 실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즉 생멸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기에
붙들고 늘어질려고 하면 할수록 고통에 휘말려 들어갑니다만
반복되는 생멸현상의 밑바탕에 있는 참다운 이치는
생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냥 그대로입니다.
이를 "여여"하다고 말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과 동일하게 있는 것입니다.
물과 음식, 혹은 설렁탕과 비빔밥과 마찬 가지로
시간이라는 과거도 있고
현재도 있고 미래도 있는 것입니다.

 "개아"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이곳에서 과거도 실체로서 인정하게 되고 현재도 실체로서 인정하게 되고
미래도 실체로서 인정하게 됩니다.

과거의 행위가 현재에 나타나고 현재의 행위가 미래에 나타나는 것은
인과입니다. 그런데 그 인과의 바탕에 있는 것은
설렁탕이 설렁탕이 아니고 비빔밥이 비빔밥이 아닌 것 처럼
인과는 틀림이 없지만
인과의 바탕에 있는 인과의 존재원리는 동일합니다.
문제는 인과가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인과라는 현상적인 것에는
어떤 실체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과를 붙들고 늘어질려고 하면
실체성이 없는 것(이것이 인과가 없다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십시요)을
붙들고 늘어지게 될 때에 벌어지는 것이
"공포와 고통"입니다.

개아가 없는데 인과를 받고 말고 이런 것이 어디에 있겠어라고
큰 소리를 빵빵 치고 살 수도 있지만
나와 너의 현상적인 삶이 분명히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 개아가 없다는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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