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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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 크로체)
날 짜 (Date): 1997년07월24일(목) 19시37분18초 KDT
제 목(Title): Re: 요즘 크로체님 근황은?




 저는 매일 여기 불교보드를 찾습니다. 요즘 무더운 날씨에 잘들 지내시는지
 궁금하군요. 저는 물론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냥 가기 뭣하니까 이야기 하나 올리겠습니다. :)
 시원한 여름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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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주인"

                       이규태

 나는 학생 시절 연극을 좋아하여 단막극 하나를 연출한 적이 있었다. 이름
을 기억할 수 없는 독일 작가의 '집주인'이라는 희곡으로, 죽은 아버지를 두
고 아들과 계모와의 재산을 둔 갈등을 그린 것이다. 출연 인물 중에 막이 열
려서부터 내릴 때까지 시트에 덮여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죽은 아버지 
역할이 있다. 물건을 갖다 놓고 시트를 덮어 놓아도 안될 것은 없지만 학생
들의 실험극인지라 배역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도교수의 분부였다. 
하지만 얼굴 한번 내밀지 않고 말 한마디 않고 누워 있는 배역을 하려고 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생각나는 이가 있었다. 나를 
만나면 항상 말단으로라도 써달라고 부탁하던 별반 친하지 않은 친구였다. 
하지 않겠다고 도망치는 것을 갖은 감언과 앞으로 좋은 배역을 약속한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어 가며 무대 위에 간신히 뉘여 놓을 수 있었다.

 이 연극의 클라이맥스는 그 죽은 집주인의 아들이 금궤를 들고 나갈까 말
까 갈등 끝에 그 금궤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대목이다. 그런데 내가 무대 뒤
에서 배경음악의 볼륨을 높이고 집주인의 아들이 금궤를 떨어뜨리자마자 갑
자기 숙연해져야 할 관중석에서 영문 모를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알고 보니 
시트를 덮고 졸고 있던 집주인이 금궤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기 때문이다. 시체가 살아났으니 웃지 않을 장사가 없었음직하다. 더욱
이 벌떡 일어난 시체가 관중석을 둘러보고는 후다닥 시트를 둘러 쓰고 누워 
버렸으니 웃음이 걷잡을 수 없이 진폭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더 이
상 연극을 진행할 수 없어 막을 닫고 무대 앞에 나아가 "희극 한 편 본 것으
로 간주해 주십시오"하고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회심의 작업을 망쳐 놓은 이 집주인은 나 보기가 민망해 미안해 피해 다니
다가 학교를 졸업한 뒤 어디서 뭣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지냈다. 
그 후 나는 셋방을 면하고 10여 평 짜리 아파트 하나가 당첨되었는데 돈 3
백만원을 조달하지 못해 어렵게 따 놓은 기득권을 놓치게 됐다. 포기하고 있
는데 통지가 오길, 상환을 연기해 주겠으니 들어와 살라는 것이었다. 그 회
사의 누군가가 보증하면 상환 연기의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을 안 것은 입주
한 지 3년 후의 일이었다. 달려가 보증 선 사람을 알아보니 생소한 이름이었
다. 물어보니 일년 전에 신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미망인을 찾아갔더니 바
로 무대 위에서 죽었다가 살아 난 바로 그 집주인이었다.

 그는 나에 대한 부채를 그렇게 말없이 갚고 간 것이다. 이제 무대에서처럼 
살아날 수 없는, 30여 년을 끈 기나긴 연극을 비극으로 마무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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